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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후기] 2017 SF 연극제: 기다리는 집-Ver.2.0.

by Heigraphy 2017. 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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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대학로 소극장에서 진행되는 연극을 찾았다. 2017 SF 연극제. 이런 연극제가 있다는 걸 알았을 때는 이미 2주차 공연이 거의 끝나갈 때쯤이었다. 남아있는 작품들 중 시간관계상 볼 수 있는 것을 추리고, 그 중에서도 시놉시스가 흥미로운 것을 또 골라보니 4주차 '기다리는 집-Ver 2.0.'이 남았다.

  삼포세대라는 소재를 가지고 SF 연극을 만들었다니, 장르가 신선했던 데다가 결코 지금 우리의 삶과 동떨어진 소재가 아니기에 더욱 궁금하고 기대가 되었던 연극. 그 첫공을 보고 왔다.

 

 

아래부터는 연극에 대한 후기이며,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무대, 연출, 조명, 의상 등등 많은 것들이 단촐하다면 단촐한 구성이었다. 위 사진에 보이는 것이 연극 시작부터 끝까지 무대에 준비된 것 전부였다. 4명의 등장인물. 두 명이, 때론 한 명이 극을 이끌어 가면, 다른 배우들이 무대 측면에서 직접 손전등을 쏴서 무대 위 인물을 비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그 손전등 빛 하나에 의존하여 연극의 거의 대부분이 진행되었다(가끔 그렇지 않을 때는, 위 사진처럼 의자에 핀조명 하나가 더 비춰지는 정도). 그렇게 사실 대단할 것 없는 연출임에도 몰입도가 높았다는 것이 일단 이 연극이 괜찮았던 이유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삼포세대가 세대를 넘어 이어져 심각한 인구 위기가 찾아왔을 때, 인구 증산을 위해 진행되는 증강현실 프로젝트, '기다리는 집'. 인공지능과 가족을 이루고 '행복한 가족'임을 주입받으며 고통스러워하는 참가자 이정남(445번). 그가 프로젝트에 대한 의문과 회의를 가질 때마다 프로젝트에 연루된 박사들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이 프로그램을 완전히 믿을 때까지(이 프로그램은 진행된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끌어내려라."

 

 

 

  SF물이면서 디스토피아를 그린 작품에 가까웠던 '기다리는 집-Ver.2.0'. 대체적으로 재미있게 봤다. 코메디 연극은 아니지만 중간중간 심어진 웃음 포인트에는 빵 터지기도 하고, 초반에 마누시(MANUSHY)에 대한 얘기가 나올 땐 소름도 돋았고, 마지막 반전과 결말까지. 말했듯이 상당히 몰입해서 본 공연이기에 50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결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진행된 연극은, 꼭 명쾌하지만은 않아서 연극이 끝난 뒤 친구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끼리 정리를 해볼 수밖에 없었다. 얘기를 나누기 위해, 연극 이후 예정에 없었던 카페를 부랴부랴 찾아갔다.

 

  인간과 인공지능이 가족을 이루고 살아가는 미래세계란 어떨까? 사람의 상태를 시도 때도 없이 수치로 파악하고, 그것을 감정 없는 기계음으로 읊으며, '인간성'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인공지능 가족'. 그리고 그것과 살아가는 '인간성'을 지닌 인간.

  처음엔 기다리는 집 프로젝트가 인간이 인공지능과 함께 살아가는 것에 적응할 수 있는지 '인간을 실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조금 더 생각해보니 '인공지능을 실험했다'는게 더 맞는 것 같았다. 인구가 급격히 줄어든 상황에서 인간을 대체할 인공지능을 좀 더 인간스럽게,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게끔 만들기 위해 '인공지능을 실험한 것'. 그러다 종래에는... 그래, 결국 둘이 공존할 수 있는 상태를 찾고자 둘 다 실험 대상이 된 것이구나 싶었다. 인간은 인공지능에 적응하게끔, 인공지능은 인간처럼 되게끔, 서로가 서로의 실험 대상인 거야.

 

  연극에서 매우 갸우뚱했던 지점도 몇 가지 있다. 먼저, '가족에 대한 트라우마->인간성'?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연극이라서 '인간성'도 그 안에서 찾은 걸까? 듣자마자 왠지 프로이트가 떠올랐고 호기심이 일었지만, '인간성'이라는 것이 어떻게 가족에 대한 트라우마를 통해 발현된다고 생각한 것인지에 대한 설명은 연극 안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다.

  또한 박사의 말에서 종종 언급되는 '인써클(in circle)'과 '아웃써클(out circle)', 하지만 그 두 세계에 대한 떡밥은 50분이라는 길지 않은 러닝타임 동안 거의 풀리지 않았고... 설정 자체는 올더슨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떠오르긴 하지만, 그 소설에서처럼 이들을 선택받은 인간과 선택받지 않은 인간이라고 단정지어버리기엔 내가 이 떡밥을 멋대로 과대해석 하는 것 같다. 그렇게 조금은 엉성하게 느껴졌던 세계관.

  마지막으로, 연극은 프로젝트의 새로운 참가자 홍미영 씨가 기다리는 집 Ver.2.0과 새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런데 이 홍미영 씨 배역이 기다리는 집 Ver.1.0의 배역과 같아서, 친구는 기다리는 집 Ver.1.0이었던 인공지능이 결말에 다시 프로젝트의 '참가자'로 등장한 것 아니냐고 물었다. 그렇다면 결말이 말하는 것이 과연 무엇이냐며. 나는 단순히 마지막 한 장면을 위해 배우를 새로 투입하기가 어려워서 1인 2역을 한 것 아닐까 싶었는데... 친구는 두 역할에 크게 다른 특징이 보이지 않아서 동일인물이라고 받아들인 모양이다. 아무튼, 내가 이해한 바 대로라면 그렇게 프로젝트는 계속되었다- 정도인데, 친구가 이해한 바 대로라면... 그러게 결말이 의미하는 것은 뭘까?

 

  연극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다. 단순히 '갈수록 인구가 줄어간다면?'이라는 질문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펼친 거라면 굉장히 포괄적이기는 하나 차라리 그 결말도 포괄적으로 이해하기가 쉬웠을 텐데, 시놉시스에 '취준생 정남'이라든가, 기획 의도에 '삼포세대'라는 사회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있음에도 정작 연극에서는 그런 부분이 전혀 드러나지 않았기에 아쉬웠다. 이 연극이 그저 '인간이 인공지능과 가족을 이루어서 살아야만 하는 미래세계' 정도로만 보일 뿐. 그래서 그 상상력은 돋보였으나, 나에게 현실적으로 와닿는 메시지는 사실 크게 없었다고 해야하나. 아예 판타지가 아닌, SF+디스토피아를 그린 작품이라면 결국 현재 세계에 던지는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이 연극은 삼포세대를 대변하고자 하는 것인가, 인간성이라는 것에 대한 근원적 고민을 담은 것인가, 인간은 인공지능 따위로 대체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설파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저 인구가 줄어가는 현실에 대한 두려움을 극단적으로 그린 것일 뿐인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지, 너무 많은 이야기를 너무 짧은 시간 안에 담으려다보니 한계가 있지 않았나 싶다.

  혹은.. 너무 현재 세계에 대한 메시지를 찾고자 하는 내가 잘못된 것인가? 확실한 것은, 보고나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되는 연극이라는 것. 그리고 이에 대해 얘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새로운 궁금증이 생겨 왠지 오히려 점점 미궁속으로(....)

 

 

  요약하자면, '기다리는 집-Ver.2.0'은 인간과 인공지능의 공존이라는 소재로 많은 것을 보여주었고, 스토리 또한 웃음도 있고, 긴장도 있고, 반전도 있고, 완급조절을 잘 해서 지루하지 않고 좋은데, 그것을 이루는 여러 가지 설정들은 약해서 조금만 파고 들어가면 느슨한 구석이 꽤 많다는 것.

 

 

 

 

  연극을 보고난 뒤 이루어졌던 고민의 흔적들. 이날 산 노트들을 주섬주섬 꺼내서, 카페에서 펜까지 빌려서 적어가면서 친구와 연극에 대한 이해와 감상을 나누었다. 위에 쓴소리를 많이 적은 것 같지만, 그런 것과는 다르게 꽤 인상적으로, 괜찮게 본 편이다(진심). 친구와 이렇게 열렬하게 감상을 나눈 연극이 오랜만이라 즐겁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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