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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 살아보기/네덜란드 일기

하우스메이트 파즈와의 대화

by Heigraphy 2018. 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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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일기 게시판이지만 오늘은 사진 없음)

 

  폴란드에서 놀러왔던 은진언니가 돌아간 뒤로 처음 쓰는 블로그. 언니와 네덜란드에서 5일 동안 투어리스트가 되어 신나게 놀았다. 킹스데이 겸해서 하루 암스테르담, 하루 로테르담, 또 하루 암스테르담 구경하러 갔다. 이번에 많은 곳을 오고가며 알크마르 기차역 안에 지하도 같은게 있는줄 처음 알았다고 했더니 언니가 그럼 그동안은 어떻게 다녔냐고 물었다. 그동안은.. 생각해보니 알크마르에 이사온 뒤로 기차를 타고 밖을 나가본 적이 없었다. 세상에?

  이곳에 도착했을 때 초기에 집보러 다니고, 친구들 만나러 다니고 하면서 기차 참 많이 타고 교통비도 많이 썼는데 내 집이 생기고 친구들과 많이 멀어진 이후로는 어딜 나가볼 생각을 별로 못했다. 네덜란드 기차삯이 비싼데 여지껏 OV Chipkaart를 못 만들어서 본의 아니게 짱박혀 살았다는 변명을 대본다. 그래도 알크마르 내에서는 많이 돌아다녀봤다고 생각하는데, 남들 보기엔 그렇지만도 않은지 한번은 하우스메이트인 파즈가 나에게 너 어제도 오늘도 집에 있었냐고, 그럼 자기랑 같이 안네프랑크 하우스를 가보는거 어떠냐는 제안도 했다.

  파즈는 스페인에서 온 나의 하우스메이트이다. 3명 사는 집에 한 명은 집에 잘 안 들어와서 거의 이 언니랑 둘이 산다고 보면 되는데, 내가 감히 그녀를 잘 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 느낀 바로는 매우 에너지 넘치고 용감한 언니다. 오랜만에 돌아온 블로그에 다른 많은 이야기들 다 제쳐두고 이 파즈와의 대화를 적는 이유는, 이 언니가 한 번씩 나에게 매우 인상적인 대화 주제를 던지기 때문이다. 때로는 내 삶에 영감을 줄 만큼 강력한 대화 주제를.

  일단 내가 이곳에 이사온 지 일주일이 채 안 됐을 때는 내게 대뜸 앞으로도 유럽에서 살 생각이 있냐고 물었다. 나는 물론 비자 기간이 남은 만큼 이곳에 지낼 것이지만, 그녀가 말하는 '앞으로도'는 도대체 얼만큼인가 싶어서 갸우뚱하고 있으니, 나보고 이곳에 공부를 하러 온 게 아니냐고 물었다. 즉 공부 끝나고도 유럽에서 살 거냐는 의미로 물어본 거였다. 나는 공부는 아니고 워킹홀리데이로 왔다고 했더니, 그거 멋지다면서 그럼 네덜란드'만' 온 거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Why? Do you have a lover here? Or you have to find one"이라는 멘트를 날려주셨다. 맞습니다, 사랑 참 중요하죠. 하하.

  어제, 그러니까 내 생일에 미역국을 끓인 김에 하우스메이트들에게 맛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파즈는 일을 가느라 같이 식사를 못했다. 그리고 오늘 저녁에 우연히(아니면 파즈가 주방에서 나는 내 소리를 듣고?) 주방에서 만났는데, 오자마자 나에게 사진으로 일을 구하는 팁을 몇 가지 알려줬다. 처음에는 페이스북에서 Expats 그룹을 가입해보라는 이야기에서 시작했는데, 갈수록 그 팁이 굉장히 구체적이고 인상적이었다(참고로 그녀는 사진 관련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저 조금 더 먼저 경험해본 사람으로서 그리고 주변에 그런 사람들을 많이 본 사람으로서 해준 조언들이었는데 내게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나는 미역국을 대접하면서 그녀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들었다.

  파즈는 내 사진이라곤 내가 찍은 한국의 엽서사진들밖에 아직 보지 못했는데, 나보고 사람들의 사진도 찍냐고 물었다. 종종 공연사진을 찍긴 한다고 했더니 요즘 사람들이 원하는 건 자연스러운 초상사진(스냅사진)이라며 이 분야를 한번 시도해보는거 어떠냐며 주변의 사례들을 몇 가지 소개해줬다. 또, 요즘은 사람들이 모두 소셜미디어에서 자신의 아이템을 홍보할 사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이곳의 특색에 맞게 치즈가게나 주얼리가게, 레스토랑 등등에서 사진을 찍고 제안해볼 수 있고, 더 나아가 사람들의 초상/스냅사진(개인에서부터 가족단위까지) 등등으로 계속 확장해 나가며 네 사진 분야를 넓힐 수 있을 거라는 이야기도 잊지 않았다. 아마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부탁해서 연습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예를 들면 지나가는 커플에게 사진 모델을 부탁하고 무료로 사진을 보내주되 내 커리어로 쓸 수 있게 해달라는 허락을 받는다든가 하는 것들이다. 실제로 행동에 옮기려면 매우 용기가 필요한 일이지만 파즈는 너무나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시도해볼 수 있다고.

  또 여기서 사진 코스를 들을 생각이 있냐고 묻길래, 아직은 계획이 없다고 말했더니, 가끔은 직접 찾아가 문을 두드려볼 필요도 있다며 이야기도 해줬다. 자신의 친구는 건축가인데 (아마도)한국에 갔다가 자신의 꿈의 건축물을 보고 이걸 지은 사람과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이 마침 네덜란드 사람이었단다. 그래서 로테르담의 사무실로 직접 찾아가 나 당신과 일을 하고 싶다고 문을 두드려서, 현재 5년째 이곳에서 일을 하며 정착하여 가족도 생겼다는 이야기.

  어떤 점에서는 이미 내가 알고 있는 이야기이기도 했고, 어떤 점에서는 생각해보지 못했던 이야기이도 했던 대화였지만, 확실한 건 이 대화 이후에 나는 새로운 자극을 받고 용기가 생겼다는 거다. 최근 나는 내 사진들을 돌아보면서 더더욱 자부심이 생겼고, 이걸로 나는 더 잘 될 거고, 내 삶은 밝을 거라는 확신도 생겼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뜬구름 잡는 기분을 구체적인 내 삶의 이야기로 만드는 것은 오롯이 내 몫이다. 파즈와의 대화를 통해 나는 꿈을 실현시킬 보다 구체적인 방법들을 보았고, 이 이야기를 어떻게 써나가야 하는지 조금 더 감을 잡았다.

  더불어, 하우스메이트들을 위해 준비한 엽서 중에 파즈는 5-6장을 골라서 가져갔는데 그 중에 한 장에 내 싸인을 받기를 원했다. 내가 너무 당황하며 나 내 사진에 싸인하는 거 처음이라고 했더니 앞으로 익숙해져야 할 거라고 했다. 사진을 찍기 시작한 이후로 마주한, 새로 느껴보는 뿌듯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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