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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y Heigraphy
시각적 기록/사색하는 연습장

비우지만 버리지 않는 삶

by Heigraphy 2019. 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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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국한 날, 1년만에 내 방에 돌아오며 '얼마나 비워져 있을까' 기대를 했다. 워킹홀리데이를 가기 전에, 당분간 서울에 안 돌아올 거라는 생각으로 방 정리를 싹 했었다. 아니, 그랬다고 생각했다. 24인치 캐리어 하나, 20인치 캐리어 하나, 백팩 하나에 담아갔던 짐들로도 1년을 부족함 없이 살고 왔기 때문에 앞으로도 딱 이만큼만 있어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차마 비우지 못하고 왔던 것들이 생각나면, 돌아가서 좀 더 비워야지 하고 생각도 했다.

  그런데 막상 돌아오고보니 방은 여전히 꽉꽉 차있었다. '덜 비운 것'이 아니라 '아예 비우지 않은 것' 같았다. 특히 내 방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옷과 책을 많이 정리한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고, 옷장이며 책장이며 빈틈이 없어서 심지어 캐리어 속의 짐을 풀 공간도 없어보였다. 네덜란드에서 짐을 쌀 때, 1년 동안 다 쓰지도 못할 가방을 뭐 이렇게 많이 가져왔나 싶었는데, 딱 그만큼이 내 방에 더 있었다. 그 외에도 일 년 동안 입거나 보거나 쓰지 않아도 생각도 안 나던 것들이었다.

  캐리어 속 짐을 풀기 위해서라도 다시 비우기 시작했다. 10년도 더 된 옷들도 있었다. 안 입은 지 수 년이 된 옷들도 있었다. 헤지고 낡은 옷들은 잠옷 한다고 남겨놨었다. 1년 정도 구독하고 끊긴 계간지가 있었고, 더 이상 보지 않는 대학 교재들과 프린트물도 많았다.

  '비운다'는 건 '버린다'는 건가? 버릴 것들을 한창 담다가, 문득 멀쩡한 것들을 버려서 쓰레기를 만들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물건이 아깝다기보다, 정말 쓸데없는 쓰레기를 만들고 싶지 않아졌다. 차라리 나누는 거라면 쓰레기도 안 생기고 누군가는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텐데. 그래서 1/5 정도만 비우다가, 아니, 버리다가 멈췄다. 캐리어의 짐은 겨우 풀었다.

  여전히 내 방에는 옷이며 책이며 음반이며 여러가지 것들이 가득 차있다. 대신 이렇게 생각했다. '더 이상 사지 않아야겠다.' 한국에 돌아왔을 때 내가 가진 것들은 이미 차고도 넘치는 양이었다. 예전에는 사고 싶어도 돈이 부족하다든가 등등의 이유로 '못' 샀다면, 이제는 사고 싶은 생각 자체가 '안' 든다. 특히 옷 같은 건, '입을 수 있는게 없어서' 산다기보다 '새롭고 예쁜 것'을 사려고 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기에 가장 먼저 끊은 소비 중에 하나다.

  짝꿍이랑 지내는 동안, 옷에 작은 구멍이 나면 바느질을 해서 꿰매 입는 모습을 봤다. 나의 구멍난 양말을 보고도 "그거 꿰매 신을 수 있을텐데"라고 하는 짝꿍이었다. 궁색한게 아니라 짝꿍은 그렇게 물건을 아끼고 검소하게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저렴한 옷이나 신발을 사서 금방 헤지면 미련없이 버리고 또 다른 걸 사던 나와는 아주 다른 사람. 그의 모습을 보고 나도 바느질을 하기 시작했다. 고작 바느질에서도 그에게 배운 점이 많다.

  많이 비워서 가진 물건이 없으면 미니멀리스트가 되는 줄 알았다. 근데 아닌 것 같다. 많이 버려야만 하는 건 더더욱 아닌 것 같다. 나는 아직도 가진 물건들이 차고 넘쳐서 스스로 미니멀리스트라고 생각하지 않고, 굳이 그런 '타이틀'을 위해 살고 싶은 마음도 없지만, 내게 정말 필요한게 무엇인지 알고, 그 외 넘치는 것들은 버리는 것 대신 나눌 줄 알고, 딱 필요한 것만으로도 만족할 줄 알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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