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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y Heigraphy
이 문화를 사랑한 방식

애정의 계기

by Heigraphy 2015.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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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IS RE21PECT 사진전 팜플렛. 리코, 팔로알토, 제리케이의 싸인을 받았었다.

 

 

  언제부터 이 문화를 사랑하게 되었나? 질문에 대한 답을 위해 거슬러거슬러 올라가보면 나의 결론은 항상 "2013년 10월 홍대 카페 1984에서 진행된 Etch Forte님의 <THIS IS RE21PECT> 사진전을 본 후부터"이다. 그 전에는 힙합에 관심이 없었냐? 아니다. 굳이 얘기하자면 나는 멋모르는 중학생 때 Soul Company의 음악을 들었고, P&Q 시절의 팔로알토와 더콰이엇을 보러 대학로 공연을 갔었으며, 내가 고1이 되던 해 슈프림팀의 음반을 샀고, 지기펠라즈의 음악에 빠지기도 했다. 고등학교 졸업하는 해에는 소울컴퍼니 마지막 콘서트도 보러 가고. 성인이 된 후에는 더 말 할 것도 없지. 그렇다고 이 씬의 모습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봐왔다면 거짓말이지만, 어쨌든 힙합이 갑자기 흥하기 시작한 최근보다는 더 전부터 이 음악을 들어왔다는 거다. 그러면서도 사실 힙합의 '힙'도 몰랐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거다. 그냥 뻔한 가요보다는 이 장르의 가사가 신선해서 좋았고, 어린 마음에 나는 남들과는 다른 음악을 듣는다는 뭣도 아닌 자부심도 작용했던 것 같다(요즘 말로는 이런 걸 힙찔이라고 하려나).

  2013년 THIS IS RES21PECT 사진전을 보러 갔던 첫 마음도, 오프닝 행사로 팔로알토가 공연을 한다는 사실을 듣고 '팔로알토를 보러 가야겠다' 한 게 고작이었다. 오프닝 행사에는 카페에 발디딜 틈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왔었고, 나와 내 친구는 팔로알토를 둘러싼 2중, 3중의 사람들 바깥쪽에서 겨우 봤었다. 사실 이 당시에 에치포르테님이 사진전을 열게 된 소감 같은 걸 말했었는데 저 사람은 누군가 싶어서 집중해서 듣지도 않았었다. 오프닝 공연을 보기 전이었나, 후였나 사진들을 대충 둘러보니 내가 다녀왔던 공연들의 사진도 몇 있더라. 신기하고 감회가 새로웠다. 당시에는 엄청 감명깊게 봤었는데 시간이 지나 잊고 있었던 공연들을 다시 사진으로 만나다니. 그래서 오프닝 파티 이후에도 사진을 보러 카페에 한 번 더 방문했었다.

 

 

▲THIS IS RE21PECT 사진전에 전시된 제리케이 사진

 

 

  그 당시엔 홍대가 내 생활의 주된 범주에 있는 공간도 아니었는데, 그것도 나름 바쁘다면 바쁜 학기 중에 굳이 짬내서 방문했었다. 저 옆 테이블을 보니 에치포르테님이 앉아서 공부를 하시다가 카페 손님이 사진을 좀 둘러보는 것 같다 하면 팜플렛을 들고 혹시 사진 보러 오셨냐며 짧은 설명을 해주시곤 했다. (여담이지만 이 때 나는 그냥 카페 손님인 척 앉아있었고 오레오맹이라는 음료를 처음 먹어보고 1984에 빠지게 되었다.) 집에 가기 전에 사진을 천천히 둘러보니 에치포르테님이 나한테도 다가오셨다. 그래서 설명을 조금 듣고, 사실 저 오프닝 파티 때도 왔었다고, 오늘은 사진을 보러 왔다고 말씀드렸다. 사진을 천천히 다 둘러본 후에 에치포르테님이랑 얘기를 좀 나눴던 것 같다.

  이 사진전을 통해 내가 충격을 먹은 부분은 힙합이라는 것을 사진으로 표현했다는 점이었다. 이 때 나는 공연도 종종 보러 다녔고, 사진도 찍으러 다녔다. 하지만 둘을 이렇게 결합해 볼 생각은 전혀 해보지 못했다. 공연에서 사진을 찍는 것은 마냥 관객들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이고 매너가 없는 짓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무조건적으로 카메라를 드는 것 말고 단 한 장이라도 그 순간을 성의있게 '잘' 찍어서 아티스트와 소통한다면 그것으로 리스펙트(respect)를 표할 수 있는 거구나 하는 깨달음을 그 때 얻었다(그래서 지금도 나는 공연장에서 사진을 찍는 스탭분들을 존경하고 좋아한다. 그것이 이 문화를 위한 그들 나름대로의 움직임임을 이해하게 되었으니). 그러면서 나도 공연사진을 '잘' 찍는 것에 대해 관심이 갔다. 그 날 에치포르테님과의 짧은 대화를 나누고 나는 두어달 후에 소니 카메라를 샀다. 그러고보면 에치포르테님이 나한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쳤는지 새삼 느낀다.

 

 

▲THIS IS RE21PECT 사진전에 전시된 빈지노 사진

 

  이해가 될런지 모르겠지만, 이 때부터 나는 힙합을 그냥 음악이 아니라 좀 더 넓은 범주로 보기 시작했던 것 같다. 힙합 하는 사람들은 '가요 부르는 가수랑 같지만 단지 음악적 색깔이 힙합일 뿐인 사람'이 아니라 그들만의 문화가 있고, 삶의 방식이 있고, ... 요즘 사실 내가 존중해 마지 않는 이 바닥을 보고 미래를 그려온 선택이 정말 맞는 건지, 힘이 빠질 때가 종종 있었는데, 그 때마다 내가 왜 이 문화를 좋아하게 되었더라 돌아보게 되었고, 결론은 늘 "2013년 10월의 어느 날 때문"이었다. 이후에도 계속 음악을 듣고, 공연을 보러 다니고, 씬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점점 더 빠져들었지. 물론 이게 사진전을 보고 바로 그 자리에서 생각의 전환이 이루어졌다면 말이 안 되지만, 이 사진전과 에치포르테님과 나눈 대화가 내 생각의 전환의 시발점이 된 건 확실하다. 단적인 예로 이 사진전 이전에는 리스펙트(respect)라는 것의 개념도 잘 몰랐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지금의 내가 요즘 말로 '힙잘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적어도 이 바닥에 애정은 꽤나 있다고 생각한다.

  졸업하면 뭐 할거냐? 하는 타인의 질문에 쉽사리 대답할 수 없다. 하다못해 부모님이 질문해도 대답하기가 정말 어렵다. 남들처럼 "삼성에 취직할 거예요", "CJ에 취직할 거예요"처럼 한 마디로 타인을 이해시킬 수 없으니까. 이 문화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람에게 이 문화를 위해 힘쓰고 싶다고 말한들 얼마나 알아줄까. 길지 않지만 짧지도 않은 이 사정을 장황하게 설명하기도 쉽지 않은 일이고. 남들이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미래를 그렸다면 이쪽 길은 생각도 안했었겠지. 다만,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방식대로 제대로 살아가기만 한다면 더 신경 쓸 것이 뭐가 있나, 하는게 지금 나의 마음가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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