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자기소개서를 쓰려니까 이때의 이야기를 계속하게 되어서, 블로그에도 남겨보는 지난날의 기록. 한국어 교원으로서 뭔가 기록을 남긴 게 생각보다 별로 없는 것 같네. 온라인 공간이지만 아는 사람들이 보면 나인 줄 알 테니 내가 특정되는 게 싫어서 그랬었는데 이제는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까 조금은 편하게 남겨본다.
태국에서 내가 처음 파견된 학교는 방콕에 있는 D학교였다. 이 학교는 내가 온 뒤부터 오히려 한국어 수업을 점점 줄이더니 마침내는 아예 커리큘럼에서 빼기로 결정한 학교였다. 덕분에 나는 다른 학교로 이동까지 해야 했지.
아무튼, 아직 내가 한참 수업을 하고 있는 중에도 수업이 많지 않아서 정규수업엔 없는 특별 수업을 스스로 열었다. 이 학교는 방콕 본 캠퍼스가 아닌 사뭇쁘라깐(สมุทรปราการ, Samut Prakan)이라는 지역에 분교 캠퍼스가 있었는데 동료 교원에게 듣기로 이곳에서도 한국어 수업 수요가 있다고 한다. 그래? 그러면 내가 가야지.
1. 한국어 특별 수업 커리큘럼 및 포스터


학기 중간부터 수업을 하게 된 데다가 학생들도 정규 수업이 아무래도 더 중요할 테니까 길게 수업은 못하고 한글부터 간단한 인사말을 배우고, 설날 떡국 만들기 문화 수업도 포함되어 있는 6주짜리 기초 수업 코스를 짰다.
정규수업이 아니라서 학교에서 시스템적으로 도와주는 건 없었고, 같은 사무실의 다른 외국인 선생님들, 그리고 본교 행정 직원 친구의 도움을 받아서 포스터를 만들고 직접 사뭇쁘라깐 캠퍼스에 방문해서 홍보도 했다. 대상 학생은 주로 비즈니스 영어 전공 학생들일 거라서 한국어+태국어+영어 무려 3개 국어로 이루어진 계획표와 신청서, 포스터 등을 만들었더랬지.
2. 한국어 수업 홍보하기


수업을 개설하기 전에 아침 7시부터 본교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분교 캠퍼스로 이동하여 동료 영어 교원 C의 도움을 받아 그녀의 수업에서 홍보를 열심히 했던 기억이 난다. 겸사겸사 A도 동행해 주어서 C가 수업하는 동안에는 A랑 캠퍼스 돌아다니면서 게시판 여기저기에 포스터를 붙이고 다녔다. 그렇게 사뭇쁘라깐 캠퍼스 학생들 약 12명에 선생님 1명까지 해서 총 13명이 신청을 했더랬다.
나중에는 방콕 본교 캠퍼스에서도 비슷하게 특별 수업을 편성해서 누구나 수강할 수 있도록 열었는데, 마찬가지로 학생뿐만 아니라 선생님도 신청을 하시더라. 한국어가 그만큼 인기이긴 한 모양이다. 학생들은 살짝 불편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수업 때 같은 선생님으로서 학습 분위기 조성(?)에 도움을 좀 받아서 오히려 든든했다.
3. 사뭇쁘라깐 캠퍼스 한국어 수업


사뭇쁘라깐 캠퍼스 가려면 7시까지 셔틀버스 타러 가야 하니까 정말 새벽같이 일어나야 했는데, 도착하면 늘 내가 교실에 첫 번째로 들어왔다(^^). 첫날에는 조금 기다렸는데도 학생들이 아예 안 와서 한 명씩 연락 돌리고 정신이 없었다. 연락이 되어도 말이 잘 안 통해서 다른 선생님 통해서 건너 건너 전달을 마치고 나니 한참 후에야 한두 명씩 등장. 매 수업 때마다 오늘은 과연 학생들이 올까, 몇 명이 올까 걱정하며 참 똥줄이 탔는데 다행히 첫날 이외에는 그래도 다들 교실에 나타나줬다.


정해진 교재를 가지고 하는 게 아니어서 직접 수업 자료 다 만들고 판서도 해가면서 열심히 수업을 했다. 나는 태국어가 안 되고 학생들도 생각만큼 영어가 잘 되지는 않은 데다가 한국어는 아예 모르니 약간 소통에 어려움은 있었지만... 학생들도 그걸 느꼈는지 두 번째 시간부터 영어를 조금 더 잘하는 학생을 데려와서 통역을 도맡게 하더라. 태국인 선생님도 많이 도와주었고, 나도 수업 자료를 최대한 태국어로 준비하려고 하는 등 노력을 많이 해서 다행히 무사히 수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어차피 기초 수업이고 한국어나 한국 문화에 대한 심도 있는 학습보다는 한국어나 한국에 대한 흥미를 유발하고 그걸 유지시키자는 쪽에 좀 더 목적이 있었기에 드라마나 예능 같은 영상 자료, 이미지 같은 것을 활용해서 수업을 진행했다. 그리고 이 수업의 꽃은 설날 즈음에 진행했던 떡국 만들기+한복 체험 문화 수업이었다.
4. 설날 떡국 만들기+한복 체험

학교에 무슨 조리시설이 있는 게 아니라서 버너부터 가스, 요리 재료와 도구를 전부 방콕에서부터 챙겨 왔고, 한복도 캐리어 한가득 챙겨 왔다. 셔틀버스 탈 때부터 짐을 이만큼 들고 나타났더니 다들 엄청 놀랐다. "내가 한국어 & 한국 문화 수업에 이렇게나 진심이다."



셔틀버스 시간이 정해져 있어서 거의 타임어택으로 수업을 했어야 했는데, 설날 설명, 한복 체험, 떡국 만들기를 거의 2시간 반 안에 모두 마쳐야 했다. 일단 한복은 한쪽에 세팅해 두고 떡국부터 만들어 먹기로.




떡국 만드는 방법을 설명해 주고 스크린에 한국어+태국어 레시피를 띄운 뒤 아이들에게 직접 만들어보라고 했더니 곧잘 만들기 시작했다. 떡을 불리고, 참기름과 식용유를 둘러서 소고기를 볶다가 물을 넣고 끓이고,... 이 과정에서 소고기 못 먹는 사람, 돼지고기(만두) 못 먹는 사람, 계란 못 먹는 사람 등등 수요조사 할 게 많은데 다행히 내 학생들은 못 먹는 게 없어서 그야말로 완전한 떡국을 맛볼 수 있었다.



학생들이 직접 만든 떡국 완성! 그러고 보니 냄비가 집 냄비인데 요리도구도 넉넉지 않아서 집에 있는 개인 냄비 들고 갔었네ㅋㅋㅋㅋ 아무튼, 다 만들고 나니 양이 많아서 주변 미화 아주머니, 경비 아저씨, 태국인 아짠 사무실 동료 등등 다른 사람들이랑 나눠서 먹었다. 다행히 다들 맛있다고 해줘서 기뻤다.
태국에 있다 보면 설날을 'Chinese New Year'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은데 떡국 나누면서 '설날', 'Lunar New Year'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한국의 명절이기도 하다는 것을 인지시킬 수 있어서 좋았다.
이후에 다들 한복도 입어보고 단체사진도 찍었는데 외장하드 자료가 날아가버리는 바람에 한복 단체사진은 못 찾겠다. 학생들이 "I am so happy"와 같은 후기를 남겨줘서 내가 더 행복했던 날. 이 맛에 한국어 교원 하지.
5. 한국어 특별 수업으로 느낀 점
사실 이걸 남겨보려고 쓴 게시물이다. 일단 정규 수업도 아닌데 꾸준히 참여해 준 학생들이 고마웠고, 겨우 6번의 수업으로도 이렇게나 좋아하는 학생들을 보니 뿌듯했다. 당시에는 시스템에도 없고 학교에서는 더더욱 밀어주지도 않는 수업을 학생들 하나 보고 개설하겠다고 나서서 몇 주 전부터 직접 기획하고 홍보해 가면서, 개강 후에는 매주 새벽부터 짐 바리바리 싸들고 다니며 고생깨나 했지만, 나의 태국 생활 중에서 세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뿌듯하고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사뭇쁘라깐의 학생들이 방콕의 학생들보다 부족하거나 의욕이 없는 것이 아닌데 시스템의 문제로 원하는 학습을 제대로 접하지 못하는 현실이 조금 안타깝기도 했다. 내가 있는 동안에는 적어도 그 기회를 많이 만들어 주고 싶었다. 같은 의지를 가진 학생들이라도 환경에 따라 성취도가 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교육이란 건 개인적 차원을 넘어 구조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부분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학생들의 경험이 또 다른 친구들에게도 소소하게 씨앗을 뿌려 한국, 한국어,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긍정적으로 더 많이 퍼지면 좋겠다. 한국어 교원이라는 건 역시 내 나라에 대한 애정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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