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째날 일정은 오후부터 시작됐다. 이 여행기 한눈에 보기에 적은대로 휴가 아닌 휴가인 여행이었기에 여행지에서도 잠깐 일을 해야 했다. 출장은 아닌데 원격으로 일은 해야하는 뭐 그런 상황. 주말 내내 고되게 돌아다녔기 때문에 빵언니도 피곤했는지 내가 일하는 동안 옆에서 좀 쉬다가 느즈막히 길을 나섰다. 더 쉬고 싶은 눈치였는데 세인트 폴 대성당(Saint Paul's Cathedral)의 티켓을 미리 사놔서 나가봐야 한다고 했다. 날짜를 미리 지정해놓았고, 4시까지 입장해야 관람이 가능하다고 했다. 언니의 대성당 관람이 끝나고 내 일이 끝나서 만나면 얼추 시간이 맞을 것 같았다.
11월의 런던은, 섬머타임도 끝났겠다, 해가 굉장히 빨리 졌다. 런던에서 일하는 동안 아무리 늦어도 2-3시면 일이 다 끝났는데, 끝나고 나오면 벌써 이렇게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언니를 만나기 위해 세인트 폴 대성당에 도착했을 때는 4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나는 직접 들어가보지는 못하고 빵언니에게 전해듣고 밖에서 외관을 감상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성당인 만큼 규모가 상당히 컸다. 성당 꼭대기의 돔에는 '속삭이는 방'이라고 해서 한쪽에서 이야기하는 소리를 반대편에서도 들을 수 있다고 하는데, 빵언니는 혼자 방문한 바람에 돔에서 속삭여볼 기회가 없었다고...
성당의 입장료는 20파운드이고 온라인으로 예매하면 17파운드인데, 온라인으로는 2일 전까지만 예매 가능하다. 토요일은 개방하지 않고, 마지막 입장 시간은 4시이다.
6시에 야간투어를 예약해놓았기 때문에 5시쯤 저녁을 해결해야 했다. 빵언니가 생각해둔 곳이 있다며 데려간 곳은 바로 버거앤랍스타(Burger&Lobster. 버거앤로브스터?).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머지 않은 곳에 지점이 하나 있었고, 아직 저녁시간대가 아니라서 그런지 자리도 널널해서 바로 착석할 수 있었다. 또 직원들도 상당히 친절했다.
우리는 B&L 콤보+깔라마리(오징어 튀김)+맥주 2잔 이렇게 해서 먹었다. 생각보다 저렴한 가격은 아니라 랍스터를 막 배터지게 먹을 수 있었던 건 아니지만, 맛있었다. 랍스터 살도 실한 편이고, 특히 버터소스가 잘 어울렸다. 버거도 맛있었고, 깔라마리도 매콤한 소스랑 찰떡인게 자꾸 손이 갔음. 메뉴+서비스fee(10%) 다해서 약 5-60파운드 정도 나왔던 것 같다. 빵언니의 은혜를 입어 맛있게 먹고 나왔다. 고마워요 빵언니.
6시가 되고 약속장소에서 가이드분과 다른 여행객들을 만났다. 이번 런던 여행은 정말 계획 없이 빵언니만 보고 온 거나 다름없는데, 언니가 한국에서 투어를 예약하고 와서 나도 즉석에서 가이드분에게 물어보고 참여했다. 어차피 평일엔 낮에 적극적으로 못 다니니까 야간투어를 하면 하나라도 더 볼 수 있겠지 하는 마음도 있었다. 게다가 오랜만에 한국어로 편하게 투어 들을 수 있어서 기대가 됐다.
야간 투어라 사실 런던의 역사와 문화에 정통한 투어는 아니었다. 깊이 있는 설명보다는 흥미 위주의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었고, 야경 보기 좋은 곳, 사진 찍기 좋은 곳 등을 주로 다녔다. 그 첫 번째 장소로 세인트 폴 대성당이 한눈에 보이는 어느 루프탑 펍에 올라갔다. 음료를 주문하지 않아도 옥상에서 야경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낮과 밤의 경계에 봤던 성당과는 다르게, 조명이 한껏 비친 한밤 중의 성당은 또 그만의 매력이 있었다.
이 세인트 폴 대성당은 런던에서 가장 큰 성당이자 세계에서 2번째로 큰 성당이라고 한다. 최초의 세인트 폴 대성당은 1666년 런던 대화재 때 불탔고, 1675년에 다시 짓기 시작하여 1710년에 완공되어 지금의 세인트 폴 대성당이 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성공회 성당으로 역할을 하고 있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런던 여행을 하다보면 비행기가 뜨는 모습을 꽤 많이 볼 수 있다. 일단 공항 수가 꽤 많은 데다가 ('런던'이라는 타이틀을 붙인 공항만 8개) 도심과 가까운 공항도 많아서 꽤나 가까이 비행하는 비행기들을 볼 수 있다.
투어 다니면서 분명 여기저기 돌아다녔는데 또 세인트 폴 대성당인가 싶을 거다. 워낙 규모가 크다보니 그 주변에선 어디에서나 잘 보인다. 마치 서울에서 어디에서나 남산이 보이는 것 같은...
성당을 바라보고 있는 이곳은 해리포터에도 나왔다는 밀레니엄 브릿지(Millennium Bridge)다. 이름 그대로 밀레니엄, 즉 새천년을 기념하기 위해 템즈강 위에 지어진 다리라고 한다. 템즈강 위의 다리라면 훨씬 더 역사와 전통있는 타워브릿지도 있는데 왜 해리포터에서는 밀레니엄 브릿지를 등장시켰는지 의문이라고 함.
투어 중 누구도 이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나는 유독 창문 아래 소 벽화가 인상적이이었다.
이곳은 과거 셰익스피어도 자주 왔다는 펍이다. 펍(Pub)은 사실 퍼블릭 하우스(Public House)의 줄임말로, 누구나 와서 이야기를 나누고 식사를 하거나 술을 마실 수 있는 문화공간을 일컫는다. 그러니 영국에 혼자 와서 펍을 혼자 가도 될까 고민한다면, 원래 누구나 편안하게 드나들 수 있는 공공장소이니 얼마든지 가도 좋다고 본다.
이 앞에서 사진을 찍은 후 실제로 펍에 들어가서 술도 한 잔씩 했다. 맥주도 종류가 너무 많아서 뭘 선택해야하나 고민했는데, 직원이 유쾌해서 술도 유쾌하게 고를 수 있었다.
그나저나 예전 같았으면 여행지에서 새로운 사람들 만나는 걸 즐기는 나였을텐데, 이때의 나는 그냥 내사람들을 만나는 여행이 좋아서 사실 대화에 아주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다. 이 순간엔 낯선 사람 10명보다 친근한 빵언니 한 명이 더 좋달까... 뭐 오래 앉아있었던 건 아니라 대화 나눌 시간 자체가 그리 길지 않기도 했다.
템즈강 주위를 돌고 돌아 투어 끝물에 드디어 마주하게 된 타워브릿지(Tower Bridge). 여기도 4년 전에 왔을 때 사연이 있어서 다시 보면서 감회가 새로웠다. 어떤 사연이냐면, 사실 타워브릿지는 런던브릿지에서 바라보면 잘 보이는데, 런던브릿지에서 한참을 멈춰서서 타워브릿지를 바라보던 중 어떤 커플이 다가와서 자신들의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두세 장을 찍는데 마지막엔 뽀뽀하는 샷을 남겨서 나름 인생샷을 남겨준 거 같아 뿌듯했다. 그리고 나도 그들에게 내 사진을 부탁했는데, 사진엔 조금 서투른 친구들이었는지 초점을 잘 못 잡았다. 고맙다고 인사하고 나중에 확인해보니 초점은 온통 타워브릿지에 잡혀있고 나는 뿌얬다. 나는 인생샷 남겨줬는데 나한테 이러기 있음..? 그때였던 것 같다. 외국인들의 사진 실력을 믿으면 안 된다는 걸 깨달았던게.
다시 현재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그때는 혼자 타워브릿지를 바라봤고, 이번에는 빵언니와 함께 봤다. 여행 중에 내가 느낀 감정을 나눌 상대가 있다는 건 정말 좋은 것 같다. 그리고 좋은 건 또 같이 보고 싶은 법이라, 짝꿍님에게 영상통화도 걸었다. 나도 모르게 하도 닭살돋는 통화를 했는지, 빵언니가 통화 너무 꿀떨어지는거 아니냐며 쪽쪽거리지 말란 이야기를 했다ㅋㅋㅋㅋㅋㅋ
이때가 이미 9-10시쯤으로 밤이 꽤 깊었는데 런던 시내는 여전히 밝았다. 런던에도 야근이 있는건가 싶었는데, 그런게 아니라 도시의 치안을 위해서 회사 건물들은 전기료를 정부로부터 지원받아 밤새도록 불을 켜놓는다고 한다. 좋은 방법이기도 한데 좀 에너지 아깝다는 생각도 많이 들었다. 어두워도 치안이 좋은 도시가 될 순 없는 건가.
약간은 속은 기분이 들었으나, 두모금에 원샷 때리고 잠깐 목 축이기는 괜찮았던 와인. 사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나는 이 투어가 썩 마음에 안 든 상태였다. 내용이 빈약하다거나 그래서가 아니라, 쓸데없고 기분 나쁠 이야기나 정보를 '투어의 일부'인 것처럼 이야기하고, 기존에 제공한다고 한 것과는 미묘하게 다른 것들을 제공하는데 그게 또 약간 속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런던에서 영국남자 만날 생각 말고 아랍왕자 만나서 인생역전 하세요(a.k.a. 취집하세요)"라든가, 다른 여행자가 인스타그램에 올린, 모 미술관에서 찍은 사진과 멘션을 함부로 캡쳐하여 보여주면서 여기서는 다들 보여주기 사진을 찍는다고 비아냥 거린다든가 하는게 그것들이다. 얘기를 나눠보니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부분에서 불쾌함을 느꼈다고 한다. 이런거 써봐야 만약 알아보면 서로 얼굴만 붉히니 웬만하면 잘 안 쓰는데, 이 투어는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갔을 부분들에서 감점 요소가 너무 많아 별로였다. 빵언니에겐 미안하지만...
너무 유명해서 거의 런던의 상징과도 같은 런던아이(London Eye). 굳이 의미를 부여해보자면 유럽에서 가장 큰 대관람차. 이것도 원래는 새천년을 기념하여 일시적으로 지어진 것이다. 국회의사당 앞에 이런 놀이기구 같은 것이 있을 수 없다며, 새천년(2000년)이 되었을 때에만 임시로 세워진 건데, 너무 인기가 많아져서 결국 철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런던아이의 색깔은 그 해 후원사의 상징색을 띤다. 내가 여행을 갔을 때는 코카콜라가 후원사였기 때문에 빨간 색을 띠고 있었고, 구글맵에 검색했을 때도 '코카콜라 런던아이'라고 나왔다. (그리고 여행기를 쓰는 지금도 '코카콜라 런던아이'라고 나오는 걸 보니 여전히 코카콜라가 후원사인 듯하다)
런던아이도 너무 커서 한샷에 담기 어려우니, 런던아이와 나를 함께 찍고 싶다면 템즈강 건너편에서 찍으세요.
시시각각으로 번쩍번쩍 불빛이 바뀌어서 눈이 갔던 주의회 회관(County Hall).
이쯤 되니 투어가 거의 마무리 되었다. 장장 4-5시간 가까이 함께 한 여행자들과 작별인사를 했다. 깊은 교류는 없었지만 이것도 인연이니 다들 무사히 여행 마치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셨길 바란다.
하루의 마무리는 아직 공사중인 빅벤(Big Ben)에서. 아직 시계만 빼꼼히 나와있다. 공사는 2021년까지 계속된다고 한다. 4년 전에 일찌감치 와서 보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뭐 이러나 저러나 투어 덕분에 늦은 시간에도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런던을 구경한 것은 사실이니, 오전 업무부터 오후 관광(?)까지 알차게 보낸 것에 조금은 뿌듯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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