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홀리데이 가서 집에만 있는게 지겨워서 정말 갑작스럽게 떠났던 여행. 일도 집에서 하고, 밥도 집에서 먹고, 영화도 집에서 보고, 모든 것을 집에서 할 수 있어서 그동안 집에서 뭉개는 시간이 많았고, 그럴 때마다 타지에 나와있다는 이유로 '그럴 수 있지'라고 합리화를 잘 했다. 밖으로 나가는 도전 아닌 도전을 해보고 싶었지만 이마저도 시도했던 것들이 몇차례 실패하다보니 점점 '하고 싶어서'라기보다 '해야해서'가 되는 것 같아서 점점 더 하기 싫었다. '안 하는게 아니라 못 하는 건데, 사실 마음 속에선 안 하고 싶기도 해. 근데 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은 들어' 이런 기분을 도대체 뭐라고 해야할지.
그러다 하루는 암스테르담에 지인을 만나러 다녀왔는데, 나와 완전히 같은 상황은 아니지만 내 이야기에 많이 공감해주어서, 그리고 이미 내가 겪은 상황과 기분을 미리 겪어본 분이라 좋은 조언을 많이 해줘서 정신을 많이 차리고 다시 삶을 의욕적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 일과 공부와 놀기(취미)를 늘 병행하며 바쁘게 지내던 내 생활의 딱 반만큼만 해도 여기서는 아주 활기찬 것일 텐데. 그럼 지금 당장 가장 의욕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놀기지! 다른 건 몰라도 이제부터 안주하는 삶따위 집어치우고 놀더라도 재미있고 확실하게 놀아야겠어!!!!!!!!
오후에 일이 끝나자마자 스키폴 공항으로 향했다. 체력만 조금 포기하면 시간대나 경비 면에서 플릭스버스(Flix bus)가 사실 여러모로 유용해서 밤버스를 타고 네덜란드에서 런던으로 넘어갈 생각이었는데, 그래도 비행기를 타는게 낫지 않냐며 기꺼이 본인 마일리지까지 사용하여 가는 비행기 예매해준 짝꿍님 덕분에 스키폴 공항에서 무려 KLM을 타고 가게 되었다.
11월 초순이라 해가 점점 짧아지고 있던 때였는데, 마침 기차를 타고 가는 시간대가 해질녘 즈음이었다. 늦을까봐 네덜란드의 빠른 직행 기차인 인터시티 다이렉트(IC direct)를 타고 가는 도중에도 창밖은 감상해야겠더라.
공항에 허겁지겁 도착했는데 오랜만에 온 스키폴 공항이라 정신이 없었다. 체크인을 하기 위해 KLM 데스크를 찾아갔는데, 아니 이게 뭐야, 셀프 체크인 서비스도 모자라서 수하물도 셀프로 부친다고?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문화충격...
한 나라의 국적기답게 위탁수하물이 약 20kg까지였나? 아무튼 상당히 넉넉해서 원래는 큰 캐리어를 가져가려다가, 4박 6일 여행에 오바하지 말자 싶어서 20인치 작은 캐리어를 가져갔더니 무게는 역시나 차고 남았다. 근데 만약 수하물 셀프 체크인 하다가 기계에서 무게 초과라고 뜨면 어떻게 되는 거야..?
시간이 마냥 여유롭지는 않아서 2.4유로 더 주고 빠른 기차(IC direct)까지 타고 간 건데, 허겁지겁 게이트로 갔더니 비행기가 지연되었단다. 1시간 20분 비행에 그 절반인 40분이나..! 이전까지 KLM을 한 번도 타본 적은 없지만 그냥 네덜란드 국적기라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이유 없이 신뢰감 팍팍이었는데 배신감 제대로였다. 이건 뭐 게이트에서 밀린 블로그나 쓰라는 팔자인가보다 싶어서 런던에서도 일을 하기 위해 챙겨온 랩탑으로 부지런히 글을 썼다.
드디어 탑승하게 된 비행기. 짧은 비행이니 창가자리를 선택했다. 근데 보다시피 밖이 이미 어두워질대로 어두워져서 이착륙 전후 잠깐을 제외하고는 밖이 거의 보이지 않았던 게 함정... 그래서 공중에서 찍은 사진도 없다.
히드로(Heathrow)공항에 도착하고 입국심사를 받기 위해 패스포트 컨트롤(passport control)의 non EU라인으로 갔다. 중국인으로 추정되는 단체관광객이 줄을 서있어서 사람이 많아보였다. 그런데 네덜란드에서 오는 비행기를 타서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EU라인으로 갔고, 알고보니 단체관광객을 받는 입국심사대와 일반 외국인을 받는 입국심사대가 구분되어 있어서, 오히려 non EU라인의 일반 외국인 입국심사대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마침 비행기에서도 빨리 나온 터라 신나서 달려갔는데, 입국신고서를 써가지고 오라며 돌려보냈다. 뒤를 돌아보니 한 7명 중 3명은 나처럼 그 자리에서 입국신고서를 쓰고 있었다. 다들 열심히 쓰고 있는데, 갑자기 "내가 기다렸는데도 당신들이 안 온 거니 난 오늘 일 끝낸다"며 입국 심사원이 하나 둘 자리를 떴다. 아니 당신들이 돌려보내놓고 이건 뭐...? 눈앞에 입국해야 하는 사람이 뻔히 있는데 그냥 퇴근한다고..?
결국 입국할 수 있는 문이 다 닫히자 너무 당황스러워서 줄 관리하던 직원에게 도와달라고 얘기했더니, 단체관광객의 맨 뒤에 가서 줄을 다시 서야한단다. 그 얘기에 2차 식겁함... 근데 내 망연자실한 표정을 읽었는지 그러면 이 다음 차례에 바로 가서 입국심사 받으란다. 그렇게 겨우 심사 받으러 갔더니, 정작 입국심사에서는 영국엔 왜 왔냐, 뭐 할 거냐, 며칠 묵을 거냐 등등 간단한 것만 물어보고 쉽게 보내줬다. 이때부터 속으로는 이미 '4년 전에 내가 품고 갔던 런던에 대한 이미지랑은 뭔가 다르구나'를 느꼈던 것 같다.
네덜란드에서 출발은 혼자 했지만 런던에서 만날 사람이 있었다. 바로 한국에서부터 날아오는 비타민 같은 나의 빵언니! 사실 유럽에 하고 많은 여행지 중에 딱 이 기간에 런던행을 결심한 건 빵언니의 영향이 500%쯤 있었다. 그러니까 런던이 중요한게 아니라 내사람을 만나는게 중요한 여행이었다. 만약에 빵언니가 스페인을 간다고 했으면 나는 스페인행 비행기를 끊었을 거다. 마침 언니도 혼자 온다고 해서 둘 다 같이 다니면 좋겠다 싶었다.
언니가 예매해둔 숙소에 나도 같이 묵기로 해서 원래는 그곳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언니랑 나랑 다른 곳에서 날아왔지만 우연히도 도착시간은 비슷해서 만약 크게 어긋나지 않으면 공항에서 만나도 되겠다는 이야기를 넌지시 했었다. 내가 안 그래도 조금 더 늦는데 연착 때문에 더 늦는 바람에 확신이 없었는데, 히드로 공항에서 언니에게 연락을 해보니 언니도 아직 공항을 벗어나지 않았다고 했다. 근데 그 이유가 캐리어가 분실돼서라고......
"인천에서 런던으로 직항을 타고 왔는데 캐리어가 분실 될 수가 있어요...?"
"응 면세점에서 사서 게이트에서 부치면 그럴 수도 있나봐....."
가 언니의 대답이었다.
어쨌든 둘 다 아직 공항이니 그럼 공항에서 보자고 했는데, 언니가 설명하는 히드로 공항이랑 내가 설명하는 히드로 공항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서로가 서로의 설명을 듣고 그곳이 도무지 어디인지 모르겠어서, 그럼 언더그라운드에서 만나자고 하여 일단 언더그라운드 자판기에서 오이스터 카드를 구매했다. 4박 6일 여행에 얼마를 충전해야 할 지 몰라 일단 보증금 5파운드+20파운드 해서 총 25파운드를 지불했다.
언더그라운드로 내려오고 보니 내가 있는 곳은 히드로 터미널 4역이었다. 그 말은 히드로 터미널 1, 2, 3역도 있다는 건데, 아니나 다를까 언니가 있던 곳이 1, 2, 3역이었고, 그래서 우리는 같은 공항에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한참이나 엇갈렸던 거다. 언더그라운드에서는 데이터가 터지지 않아 혹시 몰라 1, 2, 3역에서 내려서 지상으로 올라가서 언니에게 연락을 해봤는데, 언니는 이미 히드로 터미널 역을 출발하여 숙소를 향해 쭉 달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냥 숙소에서 만나기로 했다.
8시쯤 되었던가? 내 기준 저녁시간밖에 안 됐는데 매우 한적했던 언더그라운드.
숙소에 도착하니 9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아니 빵언니를 8개월만에 만난 것도 반가운데, 지구 반대편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재회의 순간에 우리도 모르게 런던 주택가 골목에서 꺄르르 소리를 높였다가, 이내 정신 차리고 조근조근 서로의 근황을 묻기 시작했다. 근데 언니가 캐리어 분실로 이미 반은 넋이 나가고 다른 생각은 하기 힘든 상태라... 각자 한국, 네덜란드에서는 잘 지냈는데 직항 비행기에 캐리어 없어진 게 또 생각해봐도 무슨 일이에요 정말...
시간은 좀 늦었지만 재회 첫날 밤을 그냥 보낼 수 없어서 언니와 근처 GBK(Gourmet Burger Kitchen)에 가서 맥주와 간단한 요깃거리를 먹었다. 버거집이지만 버거를 먹기엔 속도 시간도 부담스러웠던 터라 양파링 튀김이랑 치킨 윙 같은 거 시켜서 먹었던 것 같다. 시간이 거의 10시쯤으로, 식사를 하기엔 늦다면 늦은 시간이었는데도 거의 만석이길래 왜 이렇게 인기가 많나 싶었는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아마 금요일 밤이라 다들 나름대로 불금 보낸다고 나온 거 아닌가 싶었다. 불금을 햄버거 가게에서 보내는 런던 청년들이란...
빵언니와 오랜만에 만나 서로 근황을 주고받으려니 시간 가는 줄을 몰랐는데, 어느새 점원이 다가오더니 곧 문 닫을 시간이라 정리해주면 좋겠다고 했다. 11시였다. 버거집이니까 빨리 닫을 수도 있지. 그럼 근처에 펍 같은 곳 있으면 가서 맥주 한 잔만 더 하고 들어가자, 가 우리의 계획이었는데, 주변에 기본적으로 11시 넘어서까지 장사하는 곳이 거의 없는데다가, 겨우 찾은 술집도 12시면 문을 닫는다고 해서 매우 애매한 상황이었다. 아니 금요일 밤인데 왜 술집을 12시까지밖에 안 하냐고... 버거집에서도 대화 한창 물오를 때 나왔어야 했는데, 펍 가서도 그래야 하냐고......
결국 술집은 안 가기로 하고 그냥 근처 산책을 조금 했다. 숙소 주변 지리나 익힐 겸. 근데 길이 참 어둡고 그 시간에 정말 불 켜진 가게가 없었다. 날씨가 조금만 덜 춥고 길이 조금만 더 밝았더라면 편의점에서 맥주 사서 마실 수도 있었을텐데, 11월 초 런던의 밤은 생각보다 꽤 추웠다. 아직 언니랑 런던에서 같이 보낼 시간이 많으니 첫날은 무리하지 말고 이쯤에서 마무리 하기로 했다. 조금은 아쉬웠지만 사실은 내사람 빵언니를 만나서 그간 못다했던 이야기를 나눈 것만으로도 이미 여행의 절반은 이뤘던 것 같은 첫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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