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작이 빈지노 음악 캡쳐 사진이라 당황스러운가?
시작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2015년 11월쯤 빈지노(Beenzino)의 'We Are Going To'라는 노래가 발매되었고, 나는 여느 때처럼 그의 신보를 찾아들었다. 그 때부터 이상하리만치 첫 번째 벌스의 내용이 인상에 남았고, "Time to go to 카오산로드, 우린 툭툭카를 불러서 가"라는 라인이 입에 맴돌았다. '겨울에 태국행? 나도 한 번쯤 해보고 싶다!' 그게 다였다. 그처럼 당일날 쪼리에 티셔츠 몇 개 넣은 가방을 들고 훌쩍 떠날 수는 없더라도, 그냥 언젠가 겨울에 태국을 꼭 가보고 싶어졌다. 친구에게 몇 번 같이 가자고도 했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아 두 번 정도 실패했고, 그렇게 겨울에 태국을 가는 것은 나의 로망 아닌 로망이 된 채 1년여의 시간이 더 흘렀다.
2017년 겨울, 마지막 방학을 보내고 있던 나는 남들처럼 취업준비를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고, 주머니 사정도 크게 좋지 않아 열심히 놀지도 못하는, 무료하기 짝이 없는 나날들을 보냈고, 겨울이라 날이 추워 이상한 무기력함도 함께 느끼고 있었다. 기분전환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달까. 정말 졸업을 하고 나면 그 때부턴 뭐라도 해야할 것 같은데, 그 전에 꼭 나를 한 번쯤 제대로 환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런 순간마다 늘 그랬듯이 답은 여행이었다.
겨울만 되면 'We Are Going To'를 떠올리는 나에게 태국은 당연히 후보 1순위였다. 그러나 성수기에 비행기를 예매하려니 티켓값이 생각보다 너무 비쌌고, 결국 홍콩&마카오행 티켓을 알아보는 쪽으로 거의 굳혀지는 듯했으나, 그곳은 혼자 가는 나로서는 숙박비가 만만치 않더라.
'비행기삯이 비싼 태국이나, 숙박비가 비싼 홍콩&마카오나 따지고 보면 결국 비등비등하다면 굳이 태국을 포기할 이유가 있나?'
포기할 이유가 없다. 그렇게 이번엔 반드시 태국을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기왕 가는거 길게, 방콕 말고 다른 곳도 보고 오고 싶단 생각이 들었고, 마침 그 즈음에 방송에서 본 치앙마이가 내 여행 스타일과 잘 맞는 곳일 것 같아 그렇게 여행지를 확정했다. (그런데 항공권도 생각보다 매우 저렴한 것을 찾을 수 있었던 건 행운!)
▲ 언제나처럼 캐리어 반은 채우고, 반은 비우고
'혼자, 도시에서 도시를 이동하는, 일주일이 넘는, 해외'여행은 2년만이지 싶다. 외국에서 혼자 6개월도 지내다 온 나인데(그러면서 혼자 여행도 물론 많이 다녔다), 부모님은 아직도 '혼자, 해외'는 걱정이 많이 되시는 모양이다. 일행이 없다고 하면 절대 안 된 다고 하실 기세라서, 또 열흘이나 되는 시간 동안 심려를 끼쳐드리고 싶지 않아, 비록 거짓말이지만, 집에는 홍대에 사는 대학 동기 O양과 간다고 하고 걱정을 덜어드렸(?)다. 그러나 사실 그런 인물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여태 내가 여행다니면서 본 인천공항 중 가장 이용객 수가 많은 날이었고, 사진에 보이다시피 내가 이용하는 중국남방항공의 이용객이 굉장히 많았던 것 같다. 여느 때처럼 비행 시간까지 2시간이 조금 안 되게 남도록 도착을 했는데, 예상치 못하게 상당히 촉박하게 수속을 밟아야 했다.
분명 아주 여유있진 않더라도 조금은 넉넉하게 도착했는데, 탑승시간을 고작 10분 남기고 아슬아슬하게 승강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더운 나라에 가면서 부피가 큰 겉옷을 입으면 분명 큰 짐이 될 것이기에 출발할 때 입을 옷을 많이 고민했다. 다행히도, 겨울이었지만 2월 끝물에 들어설 때라 그런지, 추위가 한풀 꺾인 날씨였기에 봄옷을 입고 가도 충분히 견딜만 했다. 거기에 햇볕도 좋으니 썩 괜찮은 날 여행을 떠나게 된 셈이었다. 기온이야 많이 다르겠지만, 태국에서도 이렇게 기분 좋아지는 맑은 날씨들만 나를 맞이해주었으면.
이번 비행은 경유 포함 약 8시간의 비행었고, 갈 때는 그리 길다는 생각이 안 들었는데, 다녀온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오랜만에 꽤 긴 비행을 했구나 싶다.
이 글을 보시는 분들 중국남방항공 좌석 폭 참고하시라고 찍어본 사진. 그리 넓지는 않았던 듯. 참고로 제 키는 160이 채 안 됩니다...ㅎ
이륙하고 비행기가 안정권에 접어들자 물티슈와 기내간식을 나눠주었다. 간식은 땅콩 등 견과류들.
곧이어 나온 기내식. 치킨과 비빔밥 중에 고를 수 있었는데, 내 쪽 라인을 담당하신 중국인 승무원이 '비빔밥' 발음을 잘 하지 못 해서 다들 '비프'로 알아듣고 '치킨과 비프? 그럼 난 비프!'라고 했다가 낭패를 본 분이 두어분 있었다. 난 용케 알아듣고 진작에 치킨으로 주문. 그럭저럭 먹을만 했다.
한국에서 광저우로 가는 중국남방항공 국제선에는 스크린이나 딱히 편의시설이랄게 없었지만, USB 단자는 있었다(그러나 돌아올 때는 아무것도 없었음). 덕분에 가는 내내 핸드폰과 보조배터리를 충전하면서 갈 수 있었다.
광저우에 도착 전에 외국인 승객에게 중국 입국카드를 나눠주는데 스탑오버가 아닌 경유를 하는 승객이라면 작성할 필요가 없다. 물론 비자도 필요 없고.
3시간 가량 걸려 광저우에 도착했고, 환승을 위해 International Departures로 향했다.
광저우 공항 또한 명성답게 상당히 컸다. 인상적이었던 건 가게 상호들이 전부 중국어로 적혀있었던 것. 누가 봐도 외국어인 스타벅스까지도.
그런데... 내가 탈 비행기가 연착이 되었단다. 한 시간 십 분 가량. 개인적으로 환승시간은 2시간 정도가 너무 촉박하지도 않고, 힘들지도 않고 좋다고 생각하는데, 연착으로 인해 졸지에 3시간 넘게 광저우 공항에 갖혀있게 생겼다.
위안화 현금이 없어서 어딜 들어가서 뭔가를 사먹기도 애매하고, 가만히 앉아있자니 중국에서 잡히는 와이파이 등의 신호로는 구글도(당연히 구글맵도), 페이스북도, 인스타그램도 모두 실행되지 않아서 여간 지루하고 심심했던 게 아니다. 구글 드라이브에 저장한 계획표도 못 켜보고, 구글맵에 저장해둔 곳들을 보며 못다짠 방콕여행 일정이나 마저 짜보려고 했으나 당연히 실패했으며, 결국 아날로그적인 책을 펴들어 잠시간 훑어보았다.
이곳에 다 올리진 않지만, 지루한 시간을 견디기 위해 셀카도 참 많이 찍음.
시간이 조금 지나니 출출해졌는데, 공항에 끌리는 메뉴가 있었다면 카드를 사용하는 것을 감수하면서라도 뭔가를 사먹어봤겠지만, 그렇게까지 끌리는 음식이 없어서 관뒀다. 마침 전 비행에서 기내식으로 나왔던 소프트롤을 다 먹지 못하고 보관해뒀었는데, 생각이 나서 꺼내 먹었다. 별 맛 안 나고 담백한 거 좋아해서 정말 맛있었음.
요즘은 왠지 빨간색에 꽂혔는데, 아마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드디어 탑승하게 된 광저우발(發) 방콕행(行) 비행기. 난 중국남방항공의 하늘색 배경에 빨간색 마스코트 조합이 왠지 좋더라.
좌석 업그레이드 된 거 아니고요, 비상구 아니고요, 똑같은 이코노미 일반석인데 보다시피 좌석 폭이 아까보다 훨씬 넓다. 둘 다 국제선인데 왜지..?
조금은 흐린 광저우 하늘을 향해 드디어 이륙을 하게 되었다.
인천공항에서 체크인을 할 때 되도록이면 창가석을 앉고싶다고 했더니 광저우에서 방콕으로 가는 비행기는 창가석을 주셨다. 그 덕분에 카메라에 광저우의 아주 일부를 담을 수 있었는데, 비행기 위에서밖에 볼 수 없는 광저우니 이렇게라도 담아놔야지.
흐린 날 구름 밑은 어둑어둑하지만, 일단 올라오면 구름 덕분에 멋진 하늘 위 풍경을 볼 수 있어서 그건 그 나름대로 좋다.
비행기를 두 번 타니 기내식도 두 번 먹게 되었다. 이번엔 생선류를 시켰나..?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이것도 역시 그냥 무난했던 맛. 하나 확실했던 건 고기도, 야채도 기름에 버무려 약간은 느끼했다는 것.
식사도 마쳤으니 막간을 이용하여 못다짠 일정을 다시 짜봤다. 나보다 약 20일 정도 먼저 태국을 다녀온 친구가, 태국어로 숫자 읽는 법만 외워가도 다니기가 매우 수월해진다는 조언을 해줘서 "능, 썽, 쌈, 씨, 하" 하고 숫자도 마음속으로 읊어보았다. 그런데 지금도 "능, 썽, 쌈, 씨, 하"만 할 줄 아는 건 함정.. 6 이상은 눈치코치로 대충 알아들었다.
제때 출발했어도 방콕에 도착하면 해가 뉘엿뉘엿 질 시간이었을 텐데, 연착까지 되는 바람에 방콕으로 한창 날아갈 때 하늘은 어느새 주황빛이 되었고,
방콕에 도착할 때쯤엔 이렇게 칠흑같은 어둠이 이미 내려앉은 뒤였다.
수완나품 공항이 어찌나 큰지 외국인 입국심사장 찾는데도 상당히 헤맸다. 아니, 커서 문제가 아니라 표기가 애매해서였는지도.. 그래도 근처 직원분들에게 여쭤보니 친절하게 알려주셨다.
헤매다가 도착한 입국심사장엔 이미 사람이 바글바글했고...
입국심사 자체는 크게 까다롭거나 어렵지 않아서 무난히 통과한 뒤, 위탁수하물로 보냈던 짐을 찾았다. 중국남방항공이 나름 중국국적기라서 믿을만 하다는 얘기도 들어봤지만, 그래도 마지막까지 수하물 분실 등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짐도 무사히 함께 도착해서 다행이다 싶었다.
짐까지 무사히 찾은 후에야 정신이 들고, 그제서야 내가 정말 태국에 와있구나 싶은 실감이 났다.
3시간의 비행과 3시간의 기다림, 그리고 다시 3시간의 비행. 전부 합쳐 총 9시간이 걸려 드디어 온전히 태국(방콕)에 도착한 것이다. 분명 꽤 이른 아침부터 집에서 출발했는데 방콕에 도착하니 어느새 하루가 다 가있었다.
'3시간만 더 비행에 시간을 썼다면 프랑스 파리를 갈 수도 있었겠는데?'
세상에, 나 이번에 생각보다 꽤 긴 비행을 해서 온 거구나. 그러고보니 유럽을 한 번 다녀온 뒤로 타이페이, 오사카, 블라디보스톡 등 비행거리 2-3시간 이내의 지역들만 다니다가 모처럼 오랜만에 장시간이라면 장시간(?) 비행을 한 거다. 내게 태국은 별 이유 없이 마냥 가깝게만 느껴졌는데 물리적 거리가 생각보다 꽤 되는 곳이었다. 이 사실을 깨닫고 왠지 더 설렜다. 유럽에 다녀온 이후 이런 비행, 더 나아가 여행이 매우 오랜만이거든.
공항 실내는 그리 덥지도 않고 습하지도 않아서, 기모 티셔츠에 점퍼까지 입은 옷차림으로 '숙소까지는 가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아주 잠깐 했지만, 정말 그랬으면 큰일 날 뻔했다. 공항 화장실에서 상의를 반팔티로 갈아입고 본격적으로 공항을 빠져나갈 준비(?)를 했다. 그 이야기는 다음 여행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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