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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y Heigraphy
시각적 기록/사색하는 연습장

갈라파고스형 인간

by Heigraphy 2024. 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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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느 금요일, 니키미나즈의 새 앨범이 나왔다. 앨범 제목은 [핑크 프라이데이]. 같은 사무실에 니키미나즈 팬인 친구가 그녀의 음악을 영업했다. 국가 스트리밍 수를 늘려서 니키가 월드투어를 할 때 방콕에 방문하도록 하는 게 그녀의 목표라고 했다.

 

  그녀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니키 음악의 스트리밍 수가 필요하다. 나보고 어떤 음악 앱을 사용하냐고, 스포티파이 쓰냐고 묻는데, 나는 한국의 앱을 쓴다고 했다. (사실 한국 휴대폰 정지하면서 이것도 정지됐고, 요즘은 유튜브로 듣고>지니로 다운받는 편) 한국 것도 최근에 집계가 되기 시작했다곤 하지만, 그럼 태국이 아닌 한국에서의 카운트가 올라갈 거라며 조금 아쉬워 한다. 스포티파이, 애플뮤직, 타이달 등등, 왜 안 써? 왜긴, 내게는 지니가 제일 편하니까 그렇지. 스트리밍을 많이 하는 편도 아니고, 마음에 들면 나는 다운로드 받거나 음반을 사버리는 사람이라, 스트리밍 플랫폼에 그렇게 많은 돈을 별로 쓰고 싶지 않을 뿐이야. 그 당시에는 미처 이렇게까지 설명을 하진 못햇네.


  니키미나즈, 이름은 알지만 그녀의 음악을 제대로 들어본 적은 없다. 보통 사람이 셋 이상 넘어가면 말수가 적어지는 나에게 그녀는 주로 말을 '걸어주는' 포지션인데, 네가 좋아하는 글로벌 아티스트는 누구냐고 묻는다. 니키가 그녀의 우상인 것처럼, 나에게는 그 정도 애정을 가진 글로벌 아티스트 없는데..? 그저 유튜브로 이 음악 저 음악 유영하다가 마음에 드는 곡 있으면 다운 받아서 조금 더 들어보는 정도지, 발매일/발매 시간에 맞춰 앨범을 통으로 드는 아티스트는 없는데. 그러면 방콕에 이 아티스트가 공연을 한다, 하면 무조건 갈 아티스트가 누구냐고 묻는다. 공연은 내게 얘기가 좀 다르다. 넓고 얕게 듣는 편이고 공연을 워낙 좋아해서 노래 한두 곡만 좋아해도 나는 갈 걸? 뭐 이런 저런 생각으로 선뜻 대답을 못하고 있으니 그녀가 웃는다.


  한국인 아티스트라면 바로 대답할 수 있을 텐데. "글로벌 아티스트여야 되는 거지?" "응." 그녀는 단호하게 대답한다. 가장 최근(이라고 해도 벌써 1년 전이지만)에 갔던 존케이의 공연을 이야기한다. 사무실 친구들 모두 처음 듣는 아티스트라고 한다. 그 외에는 코난 그레이 정도... AJR은 그 순간 생각이 안 나서 대답을 못했다.

  사실 나는 소싯적에 힙합음악을 즐겨들었는데, 그 때도 외힙은 많이 안 들었던지라.. 그래도 집에 앨범이 있는 아티스트가 몇 있다. 말했다시피 나는 음악 한두 곡만 좋아도 나름의 리스펙 표시 방법으로 앨범을 사거나 공연을 보기 때문에. 그 아티스트의 이름을 말하기로 했다. 켄드릭라마, 포스트말론, ... 그러자 그녀는 반가운 기색을 내비치며 이제야 말이 통한다는 듯한 반응을 한다.

 

 

2.
  하루는 점심시간에 할리웃 및 팝스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들의 연애, 결혼 등 꽤나 사적인 부분까지 이야기를 나누길래, 안 그래도 팝스타는 잘 모르는 데다가 그런 사적인 영역은 전혀 내 관심사가 아니라 그날도 본의 아니게(?) 침묵을 유지했더랬다. 그녀는 그날도 말이 없던 내가 신경쓰였나 보다. 네가 관심있는 걸 얘기해보자고 하더니, 한국의 스타들 이름을 몇 말한다. 어.. 사실 나는 그들도 잘 몰라..

 

3.
  태국에서는 메신저로 '라인'을 많이 쓴다. 일상생활에서는 물론 업무적으로도 많이 쓴다. 그런데 최근 내 라인에 문제가 생겼다. 라인측 오류로 계정이 정지당했다. 무려 60일이나. 메시지를 받는 건 돼서 공지 확인이 가능하고, 한국 친구들과는 카톡으로 연락하기 때문에 사실 크게 불편한 점은 없다. 가끔 정말 연락이 필요할 때 문자나 전화를 써야 해서 크레딧을 충전해야 하긴 하지만.. 사적으로 연락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니어서.

  그러나 문제는, 사무실 친구들과 주말에 약속을 잡는다거나 할 때에 있다. 라인으로 뭔가 정해야 할 때가 있는데, 내가 연락이 안 되니까.

  "왓츠앱 써?"

  "아니.."

  "그러면 뭘로 연락해?"

  "한국 메신저 카카오톡으로"

  "그럼 우리랑은 뭘로 연락해?"

  "음.. 글쎄? 라인 풀릴 때까지 기다리기?"

  내가 답답한 건 없는데, 주변인이 답답할 상황이긴 하지.

  어쩌다 보니 대화가 늘 이런 식이다 보니, 그녀는 내가 한국 거 아닌 거 쓰거나 듣거나 보는 게 있냐고 묻는다. 왓츠앱? 안 써. 트위터? 안 해. 페이스북? 안 해. 틱톡? 안 해. 위챗? 안 해. 인스타그램? 해. 오 인스타그램은 해? 응. (올해로 벌써 인스타 10년 차란다?)

  사실 위 SNS들은 내가 글로벌 브랜드를 안 쓰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SNS를 안 하는 사람이라 그런 건데, 그녀는 마치 내가 카카오톡을 쓰는 것처럼 '한국 앱'을 쓰느라 '글로벌 앱'을 안 쓴다고 오해한 듯하다. 그리고 말이야, 라인도 사실 한국 건데? 한국 내에서 카톡보다  많이 안 쓴다뿐이지.

 

 

4.
  대화를 하면 할수록 뭔가 내가 엄청 고립된 인간 같다. 한국에서만 살고, 한국의 서비스만 이용하고, 한국의 엔터테인먼트만 즐기는 우물안 개구리형, 갈라파고스형 인간? 그녀랑 대화하기 전까지 단 한 번도 스스로 그렇게 생각해본 적 없는데. 오히려 나는 케이팝을 너희보다 모르는 사람인데. 오히려 나는, 너희가 너희 나라 이야기보다 글로벌 이야기를 더 많이 하는 것 같아. 매번 대화의 마무리는 "세상은 너무 서구화, 미국화 되어있어"라고 하면서, 너희가 그 산증인 같은.. 느낌이랄까?

 

5.
  나도 소싯적에 페이스북 썼고(사실 이건 지금도 메신저 때문에 쓰긴 쓴다), 왓츠앱도 썼고, 트위터는 시도했으나 별로 흥미로운 게 없어서 접었고, 위챗도 업무용으로 쓰다가 접었고, 틱톡은 관심이 없을 뿐. 10년 가까이 쓴 인스타도 잘 안 들어가는데, 다른 SNS 볼 시간 같은 거 없어.

 

  나도 켄드릭 좋아하고, 포말 좋아하고, 위즈칼리파 공연도 보러 갔고, 존레전드 공연도 봤고, 네덜란드 살 때 별 페스티벌도 다 가봤고, 태국에 온다는 여러 글로벌 아티스트 공연에 관심도 많다. 여태 내가 정보가 없어서 조용히 지냈던 거지, 콜드플레이가 내년 6월에 온다는 걸 진작 알았으면 나는 티켓을 예매했을 거야. 그런데 이미 매진이더라.

 

6.
  그러니까, 이렇게까지 된 건(?), 좋게 말하면 한국의 서비스가 글로벌 서비스에 맞먹는 퀄리티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나쁘게 말하면 내가 그야말로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인간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타지 생활하는 우물 안 개구리라니 참 아이러니 해. 그런데 관심사 밖의 일에 에너지를 쓰는 거, 그거 생각보다 좀 힘들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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