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무려 9개월 전에 혼자 쓰고 드라이브에 저장해 둔 글이다. 점심시간에 밥 먹다가 사뭇 진지한 얘기로 빠져서는, 대화의 흐름이나 결론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끄적였던 글.
일터에 국적도 종교도 다른 4명이 함께 있었는데, 한 명은 크리스천, 한 명은 무슬림, 한 명은 불교 혹은 무교, 한 명은 그냥 무교다. 그날은 크리스천과 무슬림과 무교가 밥을 먹으며 대화를 나눈 날. 아니, 대체로 크리스천과 무슬림이 대화를 나누고 무교는 관찰자의 입장에 가까웠다. 아래는 그날 의식의 흐름대로 일기처럼 쓴 글의 전문.
231031
'종교를 믿는다'는 건 J 같은 거구나. 단순히 신이 있다고 믿고, 그에 귀의하는 것이 아니라, 배운 가르침을 나의 생활에 적용하고 반영해 보는 것. 그 가운데서 생기는 의문을 외면하지 않은 채 품고, 해결하려 노력하며 살아가는 것.
국민의 96%가 불교를 믿는 나라에서 크리스천과 무슬림에 대한 토론을 이렇게 열띠게 하다니. 나는 무교이면서, 성경이나 코란에 대해 아는 바가 없고, 읽어본 적이 없어서 어떠한 말을 더 더할 수 없었다. 물론 의견이 있었다 해도 영어로 그렇게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을지도 의문이지만. '저런 게 영어를 잘한다고 하는 거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중간중간 알아듣지 못하는 단어도 좀 있었다.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은 '신의 기적'이라고 하면서, 인간의 관점은 완벽하지 않고 사람마다 다르니 '사람'이 쓴 성경은 뭔가 놓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는 그의 주장은 내가 봐도 조금 offensive 하긴 했다. 이렇게 설명하려 드는 캐릭터는 참 오랜만이라.
나는 세상 사는 여러 관점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려는 쪽에 가까워서, "코란도 읽어보고 새로운 관점도 생각해 봐"라는 그의 말에 나라면 그저 끄덕였을 지도. '알아둬서 나쁠 건 없지'하는 마음으로. 그러나 그녀는 아니었다.
내가 성경을 '스토리'로 읽어보려고 했듯이, 그녀도 코란을 그냥 하나의 '책'으로 읽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녀에겐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읽어본다고 한들 그것이 그녀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주거나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이미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을 믿고 그걸로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세상을 바라보는 또 다른 관점(그것도 오히려 그녀의 삶에 혼란을 가져다줄 수 있는)을 알아가는 게 더 이상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 하는 거지.
이슬람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이 그녀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적용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내가 섬기는 신만이 유일신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사고 체계나 지금까지의 삶이 너무 당연하게 크리스천 기반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새로운 것이 어떤 영향을 미치고 그녀의 관점을 넓힐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신'이 썼다는 그 책 하나가 세상 만물을 설명한다고 믿는 듯한 그의 태도도 흥미롭긴 했다. 결국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이슬람의 내용도 달라질 수 있다며 사우디아라비아의 예를 든 그녀의 말에, 그는 그건 그 나라와 그 사람의 문제일 뿐이라며 일축했다. 그러면 진짜 original을 믿고 따르고 섬기는 곳, 나라, 사람은 어디이고 누구인데? 결국 이슬람도 그걸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실제 용례가 나뉜다는 것이, 그가 무려 사람의 관점이 들어간 '레포트'에 비유한 크리스천의 그것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일전에는 갑자기 이-팔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팔레스타인의 관점을 설명하더니, 이번에는 시크릿 산타 얘기를 하다가 나온 때 아닌 종교 토론. 공부를 좀 더 많이 해야겠다고 느낀다. 그래, 다른 문화권이니까 지금까지는 이-팔 전쟁이든 종교 토론이든 있는 듯 없는 듯 넘어갈 수 있었지만, 혹시나 나중에 한중일 동북아 3국에 대한 얘기라도 나오면 나도 최소한의 말은 할 수 있을 정도로, 영어 공부 많이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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