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말부터 몸과 마음을 쉬고 자기 수양도 할 겸 템플스테이가 너무 다녀오고 싶었다. 그때 당시 코로나가 너무 심해서 못 가고 어찌저찌 날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1년이 흘렀다. 내 심신 상태도 그렇고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봉선사를 다녀왔다. 날짜 맞고 프로그램 맞는 곳을 찾다가 결정한 곳인데, 신청하고 보니 1년 전에도 눈여겨보았던 곳이었다. 봉선사를 한 번쯤은 갈 운명이었나 보다.
적당히 서울을 벗어나는 곳이라 더 좋았던 봉선사. 오랜만에 지하철이 아닌 버스를 타고 이동하니 창밖 구경하는 재미가 좋다. 10월 말의 한국은 역시 아름답다. 빨강, 노랑, 초록 신호등 색으로 예쁘게 어우러진 가을 나무들. 요즘은 이렇게 사소한 것 하나도 다 아름답게 느껴져서 감동을 받곤 한다.
버스를 한 번 갈아타야 했었는데, 다음 버스가 무려 60분 뒤에 온다고 한다. '설마, 다른 방법이 있겠지' 싶은 마음에 카카오맵을 열심히 검색해보았지만 다른 방법은 없다. 정류소에 계신 아주머니께 혹시나 싶은 마음에 여쭤보았다.
"혹시 여기서 봉선사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해요?"
"21번 버스 타야 돼요. 60분 뒤에 오네. 우리도 봉선사 놀러 가려다가 앞에 거 놓쳐서 딴 데 가려고. 다른 방법은 없어 21번 밖에 안 가요."
"아... 그럼 어머님들 혹시 택시 타고 가실 생각은 없으세요? (간다고 하시면 동승 후 택시비 나눠 내자고 하려고 함)"
"아이고 거기까지 가면 택시비 많이 나와~! 만 원도 넘을 걸. 급해요? 아니면 그냥 21번 기다리고, 정 급하면 이번에 오는 거 타고 OO역에 내려서 차라리 거기서 택시 타요. 그럼 좀 덜 나올 거야."
그렇지, 어머니들에게 택시비 1만 원은 큰 돈이겠지. 결국 어머니들과의 택시 동승은 실패하고 정류소에 앉아서 60분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핸드폰으로 블로그 한 편 써서 후다닥 올려버린 건 안 비밀.
30분이면 갈 거라던 어머니들의 이야기와는 다르게, 카카오맵이 말한 대로 거의 1시간이 걸려서 도착했다. 처음엔 좀 잘 빠지나 싶었는데 국립수목원 즈음부터 해서 차가 엄청나게 막혔기 때문이다. 이건 내가 생각한 거랑 좀 많이 다른데?
주차장은 이미 만차를 이루고, 그 뒤로도 차가 계속 들어오는 상황이었다. 속세를 벗어나고 싶어서 찾은 템플스테이였는데 오자마자 사람에게 치이고 기가 더 빨리는 느낌. 내가 절을 잘못 찾아왔나?
생각보다 으리으리했던(?) 일주문과, 주변으로 예쁘게 물든 단풍 나무가 있었다. 가을의 풍경이 아름다운 곳이라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찾아오는 건가?
일주문을 지나면서부터 카메라를 꺼내서 이것저것을 찍으며 슬슬 올라가다보니 누가 말을 건다.
"이것도 찍어요. 저것도 찍고. 이 절 알고 왔어요? 모르니까 일단 다 찍어 가!"
조심스럽게 말을 거는 것도 아니고 이건 그야말로 원치 않는 고나리였다. 아니 선생님, 저 이렇게 사람에 치이는 거 싫어서 여기 절까지 온 건데 여기 와서까지 겪게 하시면 제가 너무 현타 와요.
절 규모가 생각보다 꽤 크다. 일주문을 지나서도 보수 중인 부도전과 연밭을 지나 들어오면 여기가 진짜 봉선사의 입구라는 듯 불상이 서있고, 그 뒤로는 또 작은 규모의 연못이 펼쳐져 있다. 경내에는 역시나 사람이 많아 벌써부터 숨이 턱 막힌다. 이곳에서 과연 심신의 안정을 달래며 조용히 템플스테이를 마칠 수 있을까?
한 가지 다행인 것은, 방문객이 둘러보는 곳과 템플스테이를 하는 곳은 분리가 되어있다는 것이었다. 안쪽 공간은 스님들과 직원들, 그리고 템플스테이 이용자들만 다닐 수 있어서 훨씬 조용하고 차분했다.
중간에 버스를 60분이나 더 기다리느라 예상보다 늦게 도착했지만, 일찍 출발한 덕에 다행히 늦지는 않았다. 사무소에서 예약자 확인을 받은 후 법복과 침구 커버를 받는다. 나는 문화예술계 종사자/중소기업 재직자 신분으로 '쓰담쓰담' 프로그램을 신청하였기에 증빙서류를 제출하고 확인을 받았다. 절마다 신청 기간은 다르지만, 해당 신분으로 신청할 경우 1회에 한해 템플스테이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템플스테이 신청자가 많지 않아서인지 혼자 온 나는 혼자 방을 배정받았다. 일행과 함께 신청한 사람들은 같이 배정을 받기도 한 모양이다. 신청자가 많을 때는 모르는 사람과 함께 2~4인까지 방을 쓰기도 하는 모양이고. 작년부터 코로나로 인해 템플스테이 신청 자체가 전반적으로 줄어든 분위기이긴 하다.
내가 배정 받은 방은 '바르게 깨어있기'라는 뜻의 정념(正念)이었다. 바르게 깨어있는 건 어떻게 있는 걸까. 여기 있는 동안만큼이라도 그게 가능할까.
무슨 여행온 것도 아니고 숙소를 평가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아주 깔끔하고 널찍하고 온돌 바닥이라 따뜻한 그런 방이었다. 들어서는 것만으로도 온기 덕분에 마음이 편안해졌던 공간. 혼자 쓰기에는 정말 넉넉했던 공간. 사무소에서 받아온 법복과 침구 커버를 입고 씌워본다.
사실 템플스테이 오면서 책도 한 권 안 들고 온 나인데, 다행히 이곳에 기본으로 구비된 책들이 있었다. 어렸을 때 너무 인상적이게 읽었던 『무소유』의 저자 법정 스님의 책도 있길래 반가웠다. 불자도, 무교인도, 심지어 그 외 종교인도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들이 두어 권 있는 걸 보며, 템플스테이를 위해 준비된 절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수련복으로 환복. 듣던 대로 역시 편하다. 어떻게 사이즈도 딱 맞게 주셔서 바지 길이도 딱 맞았다. 이미 많이 입고 많이 빨았는지 약간 낡은 느낌은 났지만, 아무렴 어떠리. 어차피 뭐든 빌려 쓰다 가는 인생인 걸.
화장실 사진은 없지만, 있을 거 딱 있는 아담한 공간이었다. 수건이나 세면도구 같은 것은 구비되어 있지 않아서 직접 챙겨와야 한다.
3시 반인가,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이 있다고 했는데 그때까지 시간이 남아서 잠시 누웠다. 고요하면서 적당히 밝은 듯 어두운 게 멍 때리기 참 좋은 환경이다. 쉬고 싶어서 온 템플스테이에서, 이런 방을 혼자 쓰며 진짜 쉴 수 있다는 게 참 감사하다.
잠시 후 직원분이 방문을 두드리시더니 템플스테이 휴식형 일정표가 조금 바뀌었다며 안내문을 바꿔주셨다. 템플스테이 담당 스님이 새로 오시면서 스님과의 차담 시간이 새로 생겼다고 하셨다. 쉬러 왔는데 여기 있는 일정 다 참여해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나는 사실 참 쉴 줄 모르는 것 같다.
방에서 문만 열면 알록달록 가을을 머금은 운악산을 바라볼 수 있다. 할 일 없는 휴식형 템플스테이에선 이렇게 경치 바라보며 멍 때릴 수 있는 것마저도 소중하다.
보다시피 가을 봉선사가 이렇게 아름답기로 유명해서 원래 사람이 많이 찾는 절이라고 한다. 나는 그 정보를 모르고 왔다가 인파에 놀라서 벌써부터 조금 지친 마음이 들었을 뿐이고. 알고 왔다면 마음의 준비를 좀 했을 것 같다.
쉬러 와서도 쉬는 것 같지 않았던 본격적인 템플스테이 이야기는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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