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기에 앞서
2-30년 전 뭇 소년소녀들의 가슴을 울렸을 스포츠 청춘 만화 [슬램덩크] 극장판이 개봉했다. 일본 만화가 극장판으로 개봉하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예: 포켓몬스터, 명탐정코난, 짱구는 못 말려 등등), 그동안 꾸준히 언급되고 틈틈이 새로운 '화(話)'가 나왔던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슬램덩크]는 1990년대에 완결이 난 뒤로 원작의 이야기를 크게 확장하거나 추가하는 것 없이 세월이 흘렀다. 따라서 팬들 입장에서는 약 20년을 꼬박 기다린 극장판의 개봉이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당시 TV 애니메이션판과는 달리 만화 원작자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직접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감독을 맡으며 기대를 더했다.
애니메이션임에도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주 관객층이 3-40대인 것만 봐도, 원작이 연재될 당시 이 작품을 접했던 소년소녀들이 성장하여 추억을 떠올리며 극장을 찾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만큼 누군가에게는 아주 반가운 작품일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조금 벽이 느껴질 수 있는 작품일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원작 [슬램덩크]를 안 봤더라도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재미있게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 나오는 북산과 상대팀의 실력 정도는 알고 보면 좋을 것 같아서. 북산 농구부는 종합평가 결과 C등급으로 약체 중에 약체라고 볼 수 있다. 위 이미지는 만화책 속 장면으로, 북산이 C등급 평가를 받은 것을 보고 충격 먹은 북산고 농구부 5인방의 모습이다. 왼쪽부터 강백호, 정대만, 채치수, 송태섭, 서태웅.
줄거리
전국 제패를 꿈꾸지만 아직 전국 고교 농구 약체인 북산고와, 이미 최강체인 산왕공고가 고교 농구 전국체전 32강에서 만난다. 한쪽의 일방적이고 압도적인 경기가 될 것 같으나, 예상외로 경기는 꽤나 치열하고 예측할 수 없게 흘러간다.
이야기는 등장인물 송태섭의 서사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몇 번씩 엎치락뒤치락하며 경기의 흐름이 바뀔 때마다, 주도권을 가져오는 선수들의 개인 서사를 송태섭의 과거사에서의 접점을 통해 한 번씩 비춰준다.
* 아래부터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을 수 있음
감상
십수 년 전에 만화책으로 [슬램덩크]를 봤지만 이후로 작품을 다시 찾아본 적은 없어서 느낌만 남고 내용은 많이 까먹었다. 덕분에 모르고 보는 것만큼이나 짜릿했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카타르 월드컵 포르투갈전 볼 때만큼이나 긴장+간절+짜릿... 오히려 좋아. 과몰입해서, 영화 보는 내내 몸이 앞으로 갔다가 뒤로 갔다가 했다(맨 뒷자리라 다행).
이노우에 다케히코 작가님이 직접 감독으로 참여해서인지, 만화책 그림이 막 살아 움직이는 느낌이다. 오프닝에 펜으로 스케치된 북산고 농구부 5인방이 걸어 나올 때부터 전율이 찌르르 흐른다. 심장이 바쿠바쿠(쿵쾅쿵쾅)... 애니메이션은 3D로 구현했는데 어색함이 거의 없이 정말 잘 만든 작품인 듯하다.
'슬램덩크'라는 이름만 보고 보러 간 거였기에 영화에 대한 사전 정보도 거의 없었다. [슬램덩크]의 방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2시간으로 다뤘을까 싶었는데, 원작 [슬램덩크]의 클라이맥스 경기와도 같았던 산왕전의 내용을 다룬 거였다. 거기에, 원작에서는 크게 비중 있게 다뤄지지 않았던 송태섭의 이야기가 주를 이뤄 조금 놀랐다.
영화를 본 후 주호민 작가님의 감상을 봤는데, "인생 자체가 존 프레싱이었던 송태섭"이라는 표현에 아주 공감한다.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송태섭 서사... 이렇게나 딥한 줄 몰랐지. 농구로 극복해 가는 줄 알았는데, 그마저도 형의 그림자에서 오래 지내다가, 산왕전에서 마침내 '존 프레스'를 뚫고 "산왕에게 이긴다"는 형의 목표를 대신 이루며, 송태섭의 인생에서도 한 발을 나아가는 모습이 강한 희열과 찡한 감동을 준다. 원작에서는 강백호, 서태웅 등에 비해 큰 비중이 없었던 것 같은데 영화로 이렇게 풀어가는 게 인상적이었다.
플래시백이 너무 잦다는 평이 조금 이해가 되는데, 반대로, 그렇지 않았다면 안 그래도 아주 속도감 있게 진행될 경기에 쉴 새 없이 하이라이트 같은 장면들이 터져서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2시간이 되었을 것 같다. 즉, 원작과는 조금 다른 전개였지만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전개 방식은 그거대로 좋았다.
북산고 5인뿐만 아니라 상대팀인 산왕공고 인물들의 서사까지 다뤄줘서 참 좋았다. 특히 정우성... 전국 1위 찍고 해 볼 건 다 해봤으니 새로운 경험을 달라고 했더니, 그게 패배의 경험이 될 줄 누가 알았겠어. 경기 끝나고 복도에 주저앉아 엉엉 우는 모습에 나까지 짠해짐. 북산고 인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상대팀까지 버릴 캐릭터가 하나도 없도록 잘 만든 만화.
송태섭을 중심으로 북산 5인방의 서사가 하나씩 나오는 구성 좋았고, 경기 마지막 1분을 묵음으로 연출한 장면에서는 다들 숨소리도 못 낸 채 보았고, "뚫어! 송태섭!!!" 외침과 함께 'The Zeroth Sense' 노래가 터질 때 너무나 벅찼고, 서태웅과 강백호의 하이파이브를 3D로 볼 수 있는 것도 모자라 그게 다시 2D 그림으로 전환되는 연출까지, 버릴 장면 하나 없고 다 보고 나면 가슴이 웅장해진다. 온갖 명대사는 말할 것도 없고. 원래 스토리도 탄탄한데 극장판 연출을 진짜 기가 막히게 했다.
너무 오랜만에 다시 봐서, 영화 보는 내내 몇몇 설정이나 캐릭터들 성격 정도만 떠오르고, 거의 [슬램덩크] 처음 보는 사람의 입장과 같았다고 봐도 된다. (원작 진짜 깊이 본 사람들은 영화 속 디테일한 장면들 하나하나까지도 원작의 그것과 매치해서 잘 찾아내던데, 그런 걸 전혀 못 볼 정도) 그런데도 엄청 재미있게 보면서 울고 웃고 했으니, [슬램덩크] 처음 보는 사람도 재미있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
호들갑 떨긴 싫지만 이 막 벅차고 반가운 느낌을 달랠 길이 없어 SNS에 영화를 본 당일에 이것저것 올렸더니, 친구들에게 연락이 두어 개 와서 신나게 대화를 나눴다. 슬램덩크를 좋아하는 동년배가 이렇게나 많았다니. 어릴 때는 혼자 보고 혼자 좋아해서 벅찬 감정을 누구랑 못 나눴는데, 이제라도 같이 공감하는 친구들이 있어서 행복했다.
자막판으로 한 번 봤는데 아무래도 여운이 가시기 전에 더빙판도 한 번 더 봐야겠다. 두 번째는 디테일들을 찾아내는 재미로 봐야지. 개인적으로 만화책으로 [슬램덩크]를 봤던 터라 사실 만화책이 가장 다시 보고 싶다. 라떼는 말이야, 서마터폰 없을 때 밥 먹으면서 만화책 보고 그랬단 말이야. 이래 봬도 어렸을 때 만화책에 꽤 진심이었고, [슬램덩크]도 예외 없지.
왠지 집에 딱 두 권이 남아있더라. 집 책장에 한 이십 몇 년 꽂혀있었나 보다. 만화책은 빌리기보단 사 버릇하던 오빠 이제 와서 고맙고, 사달라는 대로 사주시고 지금까지 버리지도 않고 보관해 주신 부모님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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