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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21'즉흥 당일치기X3(강화도)

강화도 당일치기×2, 02 역사의 산물을 찾아

by Heigraphy 2021.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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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흥궁&대한성공회 강화성당 가는 길

  용흥궁과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은 서로 바로 옆에 위치해 있다. 용흥궁은 조선 철종이 왕이 되기 전 기거했던 곳이며,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옥 양식의 성당이라고 한다. 언덕을 올라 오른쪽은 강화성당, 왼쪽은 용흥궁이다.

 

 

용흥궁(철종의 잠저潛邸)

용흥궁

  조선 철종(1849~1863)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으로 강화유수 정기세가 철종 4년에 건물을 새로 짓고 '용흥궁'이라 이름을 붙였다.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고, 지붕을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궁의 건물은 창덕궁의 연경당, 낙선재와 같은 살림집 형식으로 지어져 소박한 분위기를 풍긴다. 경내에는 철종이 살았던 집임을 기록한 비석과 비각이 있다.
(출처: 문화재청)

- 잠저(潛邸): 임금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사는 집

 

 

용흥궁

  대한성공회 강화성당과 맞닿아있는 출입문을 지나 들어오면 나무가 심어진 들판이 먼저 펼쳐진다. 그늘 하나 없던 강화의 길목을 지나 발견한 반가운 자연 그늘.

 

 

문과 담장
사랑채 옆 우물
사랑채
잠시 휴식

  사랑채에 신발을 벗고 올라가라는 문구가 있길래 잠시 쉬어갈 겸 앉았다. 내부는 못 들어가도 마루까지는 올라갈 수 있는 모양이었다. 무더운 날에도 그늘진 한옥의 마루는 놀라우리만치 시원했다.

 

 

사랑채에서 본 풍경

  서울에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같은 으리으리한 궁궐만 보다가 용흥궁을 보니 정말 소박함 그 자체다. 이리저리 시선을 돌려도 아담한 공간에 낮은 담장과 기와지붕, 수풀 몇 포기가 보일 뿐이다. 철종이 기거했을 때는 심지어 초가집이었고, 철종 즉위 후에 기와집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러니 철종이 기거했을 때도 용흥궁의 소박함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을 것이다.

 

 

안채 뒷편 전
안채 전경(대청마루)
부엌
행랑채
도자기

  설명에 써있던 대로 살림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그래도 왕이 살았다는 유적지인데 이렇게 사람 사는 냄새가 날 수 있나. 이쯤되니 정말 궁이 아니라 그냥 양반집 같기도 하고.

 

 

후문

  부지가 크지 않아 생각보다 금방 돌아볼 수 있었다. 다 돌아봤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철종 잠저 비석과 비각은 사진을 안 찍고 나왔나보다.

 

 

정기세 생묘비&정원용 불망비

  강화유수였던 인물들의 생묘비와 불망비가 용흥궁 정문 옆에 세워져 있었다. 문충공 정원용(1783~1873)과 정기세(1814~1884)의 청렴한 덕행과 백성들을 아껴 준 공로와 은혜를 기리고자 1864년 3월에 강화유수부의 18개 연민들의 뜻을 모아 세웠다고 한다. 덕망이 높은 인물들이었나보다.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에서 본 용흥궁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1900년(광무4)에 초대 주교 코프(고요한, Charies Jone Corfe)에 의해 지어졌다.
  서양의 바실리카식 교회건축 공간구성을 따르고 있으나 가구 구조는 한식 목구조와 기와지붕으로 되어있는 점이 특징이다. 구조와 외관을 한국전통 건축양식에 적응시킴으로서 외래종교에 대한 거부감을 완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공회 강화성당은 서쪽에 출입문을 배치하여 서구 형태를 취하면서 전체적으로는 배(船)모양을 본 떠 뱃머리인 서쪽에는 외삼문 및 내삼문과 동종을 배치하고, 중앙에는 성당을 두었다. 후미에는 사제관을 배치하여 특이한 양식을 보여주며 우리나라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유적이다.
(출처: 문화재청)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내삼문
휴관

  용흥궁 바로 옆에 위치한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은 내삼문을 가장 먼저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강화성당은 현재 코로나로 인해 휴관 중이다.

 

 

한옥 위 십자가

  살면서 아마 처음 보는 듯한 광경. 참 묘하다. 기와지붕 위 십자가란 참 낯설어서 눈에 띈다.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배면+측면
성당 지붕

  성당을 빙 둘러 다른쪽으로 와보니 담장이 상당히 낮아서 성당 외관은 어느정도 볼 수 있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정돈된 경내에 십자가를 단 한옥 건물이라니.

  보통 넓은 대청마루를 입구로 둔 전통 한옥과 다른 점은, 강화성당은 건물의 좁은 부분이 입구라는 점이다. 건축양식은 한옥이나 모양은 서양의 예배당 모습을 본따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닥에 미로 같은 돌

  사제들이 사색에 잠기는 곳이라고 한다.

 

 

사제관

  성당의 뒤편에는 사제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인 사제관이 있다. 여기도 지붕마다 십자가 표시를 해놓은 것이 인상적이다.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읍내에서는 웬만하면 잘 보이는 듯한, 존재감 넘치는 강화성당의 감상은 아쉽지만 이 정도로 마무리했다.

 

 

용흥궁 공원

  강화성당에서 용흥궁 공원과 강화읍내의 일부가 내려다보인다. 공원의 정자에는 주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강화초등학교

  성당에서 고려궁지로 이동하려면 강화초등학교를 지나가야 하는데, 학교 담장에 강화도 및 강화초등학교의 과거와 현재를 보여주는 사진과 설명이 쭉 나열되어 있어서 이를 보며 올라가는 재미가 있었다. 1970년대 학교 입구에 있던 연탄집이 현재는 카페와 피아노학원 등이 되었다. 70년대에 살아보지도 않았고 이곳 출신도 아니지만, 나도 같이 '격세지감'을 느꼈다.

 

 

강화고려궁지

강화고려궁지

  고려가 몽골군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고종 19년(1232)에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1234년에 세운 궁궐과 관아건물이다.
  정궁 이외에도 행궁·이궁·가궐을 비롯하여 많은 궁궐이 있었다. 정문은 승평문이었고 양쪽에 삼층루의 문이 두 개가 있었으며 동쪽에 광화문이 있었다. 39년동안 사용되었고 1270년 강화조약이 맺어져 다시 수도를 옮기면서 허물어졌다. 조선시대에도 전쟁이 일어나면 강화도를 피난지로 정했다. 조선 인조 9년에 옛 고려 궁터에 행궁을 지었으나 병자호란 때 청군에게 함락되었다. 그후 다시 강화유수부의 건물을 지었으나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거의 불타 없어져 지금은 동헌과 이방청만이 남아있다. (덧: 외규장각은 2003년 복원)
  이 곳은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에 저항한 우리 민족의 자주정신과 국난 극복의 역사적 교훈을 안겨주는 곳이다.
(출처: 문화재청)

 

매표소

  고려궁지는 입장료가 있었다. 어른 900원.

 

 

승평문

  고려시대 때 궁터였다는 의미로 '고려궁지'라는 이름을 붙였나 보다. 무신정변을 지나 고종 19년 고려 왕조 실권을 맡았던 무신 최우가 도읍을 옮겨 대몽항쟁을 했던 곳. 규모는 작으나 궁궐과 관아의 명칭을 개경과 같게 하고 뒷산의 이름도 송악이라 하였다고 한다.

 

 

강화유수부 동헌

  고려궁지는 1631년 조선 인조 9년에 조선행궁을 건립하며 다시 활용되었는데, 이 동헌이 조선시대 강화의 행정 책임자인 유수가 업무를 보던 중심 건물이라고 한다. 내부에는 마네킹으로 유수가 업무를 보는 모습을 재현해놓았다.

 

 

동헌 앞 큰나무

  궁터만큼이나 오래된 나무가 아닐까 싶다.

 

 

외규장각

  고려궁지에서 가장 보고 싶었던 곳, 외규장각이다. 1782년 조선 정조 6년 왕실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설치된 곳. 왕립도서관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왕이 친히 열람하는 어람용 의궤를 보관하던 곳이다. 당시 지어진 외규장각은 병인양요 때 프랑스가 불태워서 없어졌고, 현재 남아있는 건 2003년에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의궤 약탈도 열받는데 남의 문화재를 불태우긴 왜 불태우냐고... 부들부들.

 

 

외규장각 내부

  현재 외규장각은 작은 박물관 같은 곳으로 활용되고 있다.

  외규장각에 보관되던 어람용 의궤의 표지는 특별하게 비단을 사용하고, 종이는 고급 초주지를 사용하였는데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의 눈에 띄었던 것도 바로 이 채색비단 표지에 선명한 그림으로 장식된 어람용 의궤들이었다고 한다. 당시 그들이 이것의 문화적 가치를 알면 얼마나 알았겠어... 겉보기에 고급스러워 보이니까 일단 들고 간 거지.

  그나마 다행인 사실은 2010년 서울에서 개최된 'G20' 정상회의에서 대한민국과 프랑스 정상의 합의가 체결되고 후속조치에 따라 외규장각 의궤가 돌아왔다는 것이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잠자고 있던 강화외규장각 의궤 297권이 145년만에 모두 고국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의궤 반환에는 역사학자 박병선 박사의 공이 컸다고 한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려궁지에서 내려다본 강화읍

  외규장각 뒤편으로 계단이 있어 올라봤는데 아무것도 없는 빈 터만 남아있었다. 뒤를 돌아 고려궁지를 다시 내려다봐도 참 휑하다. 이 넓은 터에 얼마나 많은 건물들이 있다가 소실된 걸까 잠시 상상해보았다. 개인적으로 약국(弱國)의 설움이 느껴지던 곳. 언젠가 세세한 역사적 사실은 많이 까먹더라도, 공부하면서, 유적지를 보면서 느꼈던 이 느낌만은 꼭 기억해야지.

 

 

강화동종

  강화산성 성문을 열고 닫을 때 쳤던 종으로 강화산성 남문에 걸려있던 종이라고 한다. 조선 숙종 때 만들어진 종. 1977년 고려궁지로 이전되었으나 1999년 10월 중 균열이 생겨 더이상 타종하지 못하게 되자 강화동종을 복제하여 설치하고 원래의 종은 강화역사박물관으로 옮겨 전시하고 있다. 즉 이곳에 남은 종은 강화동종 복제본.

 

 

  이렇게 용흥궁부터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고려궁지까지 강화읍내에서 꼭 봐야할 유적지는 다 보았다. 생각보다 터가 그렇게 크지 않고, 성당 같은 경우는 문이 닫혀 내부를 볼 수 없어서 세 군데를 다 보는데 시간은 별로 안 걸렸다. 약 2시간을 예상했는데 이동시간을 다 포함하여 1시간 반 정도 걸린 듯? 다만 더운 날씨에 계속 걸어다니려니 생각보다 좀 지치긴 했다. 출발할 때의 계획대로라면 이대로 동막해변을 가거나(1박 2일 시나리오) 전등사를 가야하는데(당일치기 시나리오) 둘 다 모르겠고 일단 목을 좀 축이고 쉬고 싶었다. 그래서 급하게 선회한 다음 장소는 조양방직 카페.

 

 

강화성당

  조양방직 카페 가는 길에, 멀리서도 보이는 존재감 넘치는 너란 성당. 다음엔 코로나 없을 때 와서 내부도 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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