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국내여행, 그중에서도 용진호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기로 마음먹었다. 대부도 여행기가 끝났으니 다음 여행을 또 떠나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이번에는 마음속에 두고 있던 삽시도를 가고자 했다.
차를 타고 들어갈 수 있는 대부도나 강화도와는 달리, 삽시도는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진짜 섬이다. 배는 보령(대천)에서 탄다. '그럼 겸사겸사 보령(대천) 구경도 하지 뭐!' 그렇게 결정된 2박 3일 보령 여행.
성수기에 가는 여행이 아니다보니 모든 것을 전날 결정하고 예약해도 무리가 없었다. 목적지도, 동선도, 기차도, 숙소도. 다만 주말이라 그런지 대천역 가는 기차는 매진이길래 고속버스를 타려다가, 첫 번째 목적지도 돌연 바꿔버렸다. 대천역이 아닌 '청소역'으로.
청소역은 아주 작은 간이역이라 서울에서 가는 기차가 하루에 4번만 멈춰 선다. 그중에서도 시간을 알차게 활용하려면 용산에서 오전 5시 37분에 출발하는 무궁화호를 타야 했고, 지하철도 안 다니는 시간이라 버스를 타고 용산역으로 향했다. 금요일 자정까지 일하고 밤새고 4시 땡 되자마자 부랴부랴 출발.
지하철 막차 끊겨서 한밤 중에 버스 타고 귀가한 적은 있어도, 새벽부터 버스를 타고 어딘가로 향해본 건 처음이지 싶다. 새벽 버스에 사람이 그렇게 많은 줄 몰랐고, 새벽의 도로가 이렇게 막히는 줄 몰랐다. 몇몇은 등산을 위해 탄 것 같고, 몇몇은 이 시간부터 어딜 그렇게 바삐 가는 걸까?
사실 용산>청소 기차는 용산역 오는 버스에서 예매했는데, 보다 보니 용산>대천 기차도 거의 기차 한 칸 정도의 좌석이 풀린 것 같았다. 한두 장도 아니고 한 칸이 거의 빈 것으로 뜬 걸 보면, 정확한 건 아니지만, 아마 오프라인 발권을 위해 몇 장은 묶어뒀다가, 당일까지 예매가 안 된 좌석은 코레일 어플에 풀리는 것 같다. 그러니 코레일 어플에 매진이라고 떠도 당일 새벽 정도까지 기다려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팁 남겨봄.
기차에서 깊게 자진 못하고 꾸벅꾸벅 졸다가 8시 10분쯤 청소역에 내렸다. 2시간 반 정도면 용산에서 청소역을 갈 수 있다. 이 꽤나 작고 생소한 역까지 온 이유는, 충청수영성을 가기 위해서이다.
내렸는데 날씨가 너무 좋아서 일단 합격. 서울에선 느껴볼 수 없는 한적한 느낌도 참 좋다.
사실 청소역은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는 곳이다. 청소역사는 장항선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역사로,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어서 건축적으로나 철도사적으로나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어 국가등록문화재 제305호로 등록되었다고 한다. 폐역이 될 뻔한 위기에서도 살아남았다고 하는데, 이런 역을 이때가 아니면 또 언제 와보겠나 싶어서 오기로 결심했다.
그나저나 이름이 '청소역'이라서, 역무실에서 새파란 대걸레 빌려서 이 앞에서 청소하는 컨셉으로 사진 찍는 것도 묘미인 모양인데, 혼자라 찍어줄 사람도 없고 민망+시간이 너무 일러서 역무원 분들 부르기도 뭐해서 그냥 역사 사진만 찍었다(..는 사실 아쉬워..).
역 바로 옆에 사진 찍기도 좋고 쉬어가기도 좋은 자그마한 공원이 하나 있다.
청소역은 영화 <택시운전사> 촬영지라고 한다. 그래서 기차 모형과 더불어 택시 모형 및 송강호 씨 등신대가 서있다. 나름 포토존인 듯하여 혼자 사진도 열심히 찍어봤는데 결과물이 마음에 안 들어서 패스..
서울에서 기차로 2시간 30분 거리.
이래봬도 내려서 공원 둘러보고 이것저것 하다 보니 40분 가까이가 지나 있었다. 슬슬 충청수영성으로 이동하고 싶은데 버스가 언제 어디로 오는지, 오긴 오는지 모르겠다. 카카오맵에 나오는 버스는 701-1번 버스인데, 청소역 앞에는 왠지 900번 버스 정류소밖에 없다. 정류장을 겸하는 편의점에 들어가서 먹을 거 하나 사면서 여쭤보니, 버스가 오긴 오는데 몇 번 버스가 오는지는 모르시겠단다. 그러다 발견한 청천벽력 같은 한 줄, "토, 일, 국경일 운행 안함"
어차피 택시를 타고 가야 할 것 같아 인근을 돌아보며 불 켜진 식당에 식사가 되는지 물어봤지만, 오전 9시에는 아직 안 된단다. 갑자기 저 멀리 버스가 한 대 보인다. 혹시나 싶어 정류장으로 후다닥 돌아가서 보니, 기다리던 701-1번 버스이다. 9시 5분쯤 결국 버스를 탔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뚜벅이 운도 좋지. 아, 버스비는 1,500원이다.
1시간 조금 안 되게 달려 도착한 곳. 여기에서부터 충청수영성까지 조금 걸어가야 한다. 날씨가 정말 예술이고, 보는 것만으로도 평화로워지는 풍경이 펼쳐져서 그간 서울에서 뭐에 쫓기듯 했던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주말이라 사람은 없지만, 2층짜리 아담한 학교 그 자체로 참 정겨워 보인다. 학교가 참 좋은 곳에 터를 잡았네.
언제부턴가 거울 셀카 따위를 셀프 포트레이트라고 부르는 중ㅋㅋㅋ 여행 중에 내 사진을 남길 수 있는 방법 중 하나.
서해로 침입하는 외적을 막기 위해 돌로 높이 쌓아 올린 석성(石城)인 충청수영성. 조선 초기에는 그 역할을 톡톡히 했고, 조선 후기에는 병인박해 때 천주교 신부 다섯 명이 순교한 곳이다. 단순히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바다가 아름답다고 해서 왔는데, 역사적 가치가 아주 높은 곳이었구나.
미리 적어보자면 성에 와서 정작 성벽은 안 보고 영보정에서만 실컷 시간을 보내다 왔다. 이미 이 자체로 그림 같은 풍경.
한옥과 바다, 그리고 뭇 선박들이 함께 보인다니, 흔히 보기 힘든 귀한 풍경인 듯싶다. 여행 다니며 그동안 많은 바다를 봤지만 이건 정말 처음 보는 풍경이야.
영보정 옆을 지키고 있는 나무 한 그루와, 바닥에는 대부분 홀씨로 바뀌어버린 민들레들이 깔려있다. 밟지 않도록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겨본다.
충청수영성에서 바라본 오천항 바다. 색이 무척 아름다워서 한참이나 시선을 빼앗겼다. 듬성듬성 떠있는 배들도 한껏 운치를 더해준다. 나 이런 풍경 지중해에서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정말 유럽여행 부럽지 않았던 풍경.
충청수영성의 쉼터 역할을 하는 정자, 영보정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세상 경치 중 가장 뛰어났다"고 표현한 곳이라고 한다. 그만큼 천하절경으로 이름을 떨친 곳이며, 2013년에 복원을 했다.
아래에서 올려다본 추녀는, 알록달록 수려하면서도 색이나 문양이 과하지 않고 아름답다. 하늘의 색과도 참 잘 어울린다. 꺾어진 목이 아픈 것도 잊은 채 가만히 올려다보게 하는 매력이 있다.
붉은색 기둥과 초록색 대들보 및 서까래가 참 조화로운 모습이다. 규모가 꽤 크고 널찍한 편. 신발을 벗고 올라와야 하는 영보정에는, 앉아서 쉬는 사람은 물론 아예 누워서 여유를 즐기는 사람도 있었다.
난간에 걸터앉아 바다를 감상한다. 기둥을 프레임 삼아 보니 또 색다른 풍경이 펼쳐진 것 같다. 보는 각도에 따라 시시각각 다르게 변하는 듯한 물색도 참 오묘해서 계속 바라보게 된다. 내가 언제부터 바다를 이렇게 좋아했더라?
물 색깔이 다채로운 바다, 해수욕장 바다가 아닌 항구가 있는 바다는 왠지 자꾸 유럽 생각이 나게 한다. 네덜란드에서, 몰타에서, 이탈리아에서 봤던 바다가 딱 이런 느낌이었던 것 같은데.
가만히 앉아있으니 바람 솔솔 불어온다. 오래 있다 보니 쌀쌀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니, 여름에 오면 정말 시원하고 좋을 것 같다.
전날 갑자기 대천역이 아닌 청소역으로 와야겠다고 결정한 만큼, 충청수영성은 참 즉흥적으로 향한 여행지였는데, 첫날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장소였을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서울에서 뚜벅이로 오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다음에 또 오라면 또 올 수도 있을 만큼.
충청수영성에서 보이는, 덩그러니 세워진 교회 하나. 초록에 둘러싸여 있어서 괜히 더 돋보인다. 충청수영성에서는 꼭 바다가 아니더라도 주변에 멋진 풍경이 많다.
살아있는 것들의 생기를 북돋아주는 봄은, 살아있지 않은 주변의 것들도 활기찬 분위기 속으로 끌어안는 듯하다. 봄에만 보고 느낄 수 있는 풍경이란 게 분명히 있는 것 같아.
오천항 근처에 있는 충청수영성.
보령(대천)여행을 간다면 꼭 가보기를 추천하는 곳.
청소역에서 701-1번 버스를 타고 갈 수 있다.
충청수영성을 뒤로하고 슬슬 내려가 보기로 한다. 초록이 이렇게나 우거진 걸 보니 봄이 아니라 벌써 여름 같기도 하다. 그 속에서 다정하게 함께 내려가는 부부의 모습에 내 마음도 따뜻해진다.
조금 전 위에서 '한옥과 바다가 함께 보인다'며 감탄했던 그 '한옥'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에 빈민 구제를 담당했던 곳. 충청수영성에 몇 안 남은 건물 중 하나이다. 마루 정도는 올라가볼 수 있는지, 아주머니 몇 분이서 이곳에 앉아 더위를 식히고 계셨다.
웬 사람이 바글바글 서있길래 도대체 뭔가 싶었는데, 칼국수집 앞에 줄을 선 거였다. 충청수영성 아래에 매우 맛있는 칼국수집이 있다고 해서 오픈 시간에 맞춰 내려간 건데, 내가 가려던 곳은 물론 맞은편까지 이미 만석에 대기줄이 한 바가지였다. 점심.. 못 먹어.. 새벽 4시부터 출발한 이 여행 첫끼는 언제 먹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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