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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적 기록/사진일기

리틀 포레스트는 아닌 그냥 시골 생활기 01

by Heigraphy 2021.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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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째 날 아침이 밝았다. 전날 <리틀 포레스트> 보느라 늦게 잤지만, 삼촌과 숙모가 오전에 일찍 출발하신다고 해서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두 분 배웅해드리고 혼자 있을 때 더 자든가 해야지.

 

숙모가 차려주신 감사한 아침밥
괜히 창가에 앉아서 바깥 보면서 마시는 커피

  커피까지 한 잔 하신 후 삼촌과 숙모는 서울로 가셨다. 드디어 혼자만의 시간이 생겼다.

  기다렸다는 듯이 캐리어에서 스피커를 꺼내서 살면서 가장 크게 노래를 틀어보았다. 휴대폰에 '경고' 표시가 뜰만큼 볼륨을 높여도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도 없고, 눈치 볼 사람도 없고. 목청껏 따라 부르고 휘파람 불어도 누가 들을까 봐 창피해할 필요도 없고. 도시에서는 혼자 살아도 앞, 뒤, 옆, 위, 아래 집 눈치 보며 못 해볼 일이겠지. 이것만으로도 시골 생활 만족도가 벌써 너무 높다.

 

 

요거트+죠리퐁의 조합... 처음 시도해보았는데 그럭저럭

  오늘은 가벼운 마실을 나가볼 예정이기에 든든히 먹었다. 일전에 호텔 조식으로 요거트를 너무 맛있게 먹어서 시내에서 장 볼 때 요거트를 사 왔는데, 콘푸라이트 대신 죠리퐁을 사 와서 같이 먹어보았다. 존맛!!까진 아닌데 그럭저럭 먹을 만하다. 근데 그냥 우유도 사올 걸.

 

 

<리틀 포레스트> 보고 갑자기 꽂혀서 만들기 시작한 수제비 반죽
망했죠?ㅎ

심폐소생 중
겨우 살려놨다ㅎㅎ

  시골에선 밥해먹는 게 일이다. 반죽 열심히 해놓고 숙성 시켜야 한대서 정작 점심에는 못 먹고 냉장고에 잘 모셔뒀다. 이런데 왔다고 난생처음 밀가루 반죽을 직접 다 해봤네. 사실 시내에서 장 볼 때 칼국수 면도 사 오려고 했는데 못 찾아서 못 사 왔다. 여기에 직접 와보기 전에는 밀가루 있는 거 알았어도 직접 만들어 먹을 생각은 전혀 안 했을 텐데. 수제비 다음은 칼국수가 될 것만 같은 이 느낌은.

 

 

삼촌 밭에서 가져온 유기농 배추가 오늘의 재료
아침에 먹고 남은 청국장도 감사할 따름
고추장 넣고 슥삭슥삭 비벼 먹어본다
하나 남은 조기도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꾸벅

  이웃집 할머니가 써주신 청국장으로 끓인 찌개와, 삼촌 밭에서 따온 배추와, 집고추장을 버무려 만든 건강한 한 끼. 거기에 조기로 단백질 보충까지 완벽한 식사였다. 

 

 

창틀 위 무당벌레. 당연히 벌레가 많이 나오는 집이지만 아직까진 괜찮다. 이곳에선 벌레를 잡지 않고 최대한 방생한다.
마당개, 이름은 메리

  시골에서 키우는 강아지. 생긴 게 시바인 듯 진돗개인 듯 출생의 비밀은 모르겠다. 반경 1m의 삶이 좀 안타깝기는 하지만, 이곳에선 삼촌의 규칙이 있는 거고 나는 기껏해야 며칠 지내다 갈 손님이니까... 이 녀석의 삶을 내가 평생 책임질 수 없어서 섣불리 내 관념대로 뭔가를 하기보다 그냥 있는 동안 많이 찾아가서 예뻐해 주기로 했다.

 

 

개잘생김

밥 맛있게 먹고 있으면 누나 금방 다녀올게

  초면인 나랑도 이렇게 신나게 놀고, 사람을 이렇게나 좋아해서 집은 지킬 수 있겠니 메리야? 아무튼, 메리와 조금 놀아주고 길을 나선다.

 

 

삼촌 밭의 파. 언젠가 즉석에서 따서 먹을테다.
삼촌 밭의 배추. 오늘 점심 재료의 주인공.

  수확철도 지났고 이미 많은 작물들이 일용할 양식이 되었거나 시들었지만, 그 속에서도 조금 남아있는 것들이 있었다. 특히 배추 같은 경우는 마을을 둘러보면 재배한 집들이 참 많던데, 시골에서 그만큼 흔한 작물인가 싶고 그렇다. 나도 삼촌께 허락을 받고 밭에 있는 것들 조금씩 뜯어 먹고 사는 중.

 

 

곧 비가 온다더니 구름이 많이 끼었다.
차도 거의 안 다녀서 차도로 걸어도 될 정도로 한적한 길
논과 밭과 산. 건너편에도 작은 마을이 있는 듯하다.
어느 집의 소소한 양계장

  계란을 자급자족 할 수 있어서 좋겠다는 생각이 든 나는.. 벌써 시골살이에 적응을 다 한 걸까 허허.

 

 

갈대밭? 억새밭?
빠지면 섭한 내 사진
또 다른 마당개

  사람이 지나가면 짖기 바쁜 시골의 마당개들. 체구는 비슷한 듯한데 메리랑 짖는 소리가 다르길래, 개들도 목소리가 있나 싶어서 조금 보다가, 은근히 보기 힘든 황구라서 귀여워 사진 하나 찍었다. 그 옆으로 주인집의 차가 지나가며 내가 사진 찍는 걸 본 모양이다.

  "사진 왜 찍는 거예요?"

  "예?(당황) 강아지 귀여워서요.."

  "아~ 네ㅎㅎ"

  너무도 경계심 가득한 말투에 약간은 따지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잔뜩 쫄았다. 귀여워서 찍었다고 하니 갑자기 사람 좋은 웃음 하며 그냥 수긍하셨지만, 다른 의도가 있다고 생각하셨던 걸까. 그분들 입장에서 타지에서 온 것 같은 사람이 집 주변 사진을 찍으니 경계심이 생기는 게 이해는 되지만, 그 덕분에 나는 또 이방인이라는 느낌을 잔뜩 받았네. 맞아, 이곳은 나의 작은 숲이 아니지. 리틀 포레스트가 될 수 없다는 걸 다시 한번 실감한 순간.

 

 

노을이 지는 방향을 따라 걷고 걸어
도착한 엄마의 초등학교. 작아도 너무 작다. 1층짜리 건물 하나가 끝이라니.
어릴 땐 이걸 어떻게 했더라 싶어서 다시 한 번 도전. 다행히 아직 팔힘 죽지 않았다(?)

  주말이라 사람도 없겠다, 괜히 운동기구인 듯 놀이기구인 듯 하는 것들을 조금씩 건드려보았다. 철봉이 이렇게나 낮았었나, 어릴 때 이렇게나 힘이 필요한 놀이들을 했었나 하는 새삼스러운 생각들과 함께 내 학교도 아닌 곳에서 괜히 미적대며 시간을 보냈다. 엄마는 이런 초등학교를 다녔었구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갑자기 찍고 싶어졌던 요즘 차고 다니는 염주.

  불자는 아닌데 요즘 자꾸 나도 모르게 부처님의 힘을 빌리려고 하는 것 같다. 위 염주는 수년 전에 일본 여행 갔다가 기념으로 사온 염주인데, 불교의 팔대 명왕 중 내 생일에 맞는 부동명왕의 염주를 샀었고, 부동명왕은 일체의 악마를 굴복시키는 왕이라고 한다. 짱 쎈 듯한 부처님 기운 받아서 나도 힘내서 지내보려고. 한참을 잊고 살다가도, 기운을 좀 내고 싶을 때면 자꾸 꺼내보게 되는 희한한 팔찌. (자꾸 이런 이야기만 쓰니까 누가 보면 나 요즘 엄청 힘든 줄 알겠다.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약간의 방황을 하는 중일 뿐.)

 

 

보면 안 찍을 수 없는 새 사진
소나무를 배경으로 훨훨 날아가거라

  해 지기 전에 부지런히 걸어서 집에 돌아온 후에는 저녁식사를 위해 본격적으로 수제비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냥 수제비는 조금 심심할 것 같으니까 김치 수제비를 만들어야지.

 

 

멸치 국물 우리기
백선생님 레시피로 김치 수제비 양념장 만들기

애호박이 있어서 다행이야... 미처 못 사왔는데 남겨두고 가신 삼촌께 감사를..
멸치 국물 우리기 완료. 반은 수제비에 쓰고 반은 용기에 담아뒀다가 다음에 쓰기.

  마트에서 파는 국물내기용 티백 말고 직접 국물을 우려본 건 처음이다. 인스턴트는 최대한 지양하고 자연의 재료로 다 해보는 시골 라이프. (물론 바로 옆에 마트가 있다면 또 그냥 티백 사다 먹었을 수도 있지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이어가는 건강한 시골 라이프ㅎㅎ)

  내가 서울에서 자주 먹는 소스(ex. 불닭소스, 마요네즈 등등)는 없어도, 기본적인 요리를 할 때 필요한 조미료들은 다 있어서 다행이었다. 서울에서 내가 얼마나 자극적이고 속 부담스럽게 먹었는지가 또 느껴지던 부분.

 

 

멸치 국물에 양념장 투하
신김치도 서걱서걱 썰어 넣는다
숙성 잘 돼서 쭉쭉 늘어나던 수제비 반죽도 하나씩 뜯어서 넣기
채 썰어놓은 애호박은 마지막에

수제비 한 그릇 뚝딱 완성
추운 날 몸 녹여가며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계획에도 없다가 밀가루와 애호박만 보고 즉흥적으로 만들어 먹은 수제비 치고는 맛이 괜찮았다. 특히 수제비가 아주 쫄깃쫄깃한 게 만족스러운 식감이었다. 원래 혼자 놔두면 뚝딱뚝딱 요리 잘해 먹지만, 이렇게까지 만들어 먹은 건 시골에 내려왔으니 해본 거라는 걸 잘 안다. 그러니 그냥 이곳에서의 삶에 충만하다가 가려고.

 

 

일요일 밤의 마무리는 슈카월드지

  TV 안 보고 산지는 오래되었지만, 그만큼을 유튜브를 더 보는 우리네 삶. 일요일 밤에는 여지없이 슈카월드 라이브 방송 봐줘야 된다. 과자 몇 점과 까망베르 치즈 조금 잘라놓고 파울라너 뮌헨 라거와 함께 마셔본다. 실컷 건강식 먹어놓고 야식은 결국ㅎㅎ 그나저나 시청 이래로 처음으로 게스트가 와서 노래를 부르던 이날 방송. 덕분에 슈형은 야근을 했고, 내일 출근 그런 거 없는 나는 그냥 늦게까지 슈형 목소리 더 들은 거지 뭐ㅎㅎ 그래도 주제 2-3개 건너뛴 건 좀 아쉽다.

  지내고 보니 평소보다 요리를 조금 더 했다는 것 말고는 서울에서의 생활 루틴과 크게 다른 게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오히려 나는 여기서 여전히 객(客)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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