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by Heigraphy
시각적 기록/사진일기

리틀 포레스트는 아닌 그냥 시골 생활기 04

by Heigraphy 2021. 11. 27.
반응형

 

  요즘은 이틀에 한 번쯤 불을 때고 있다. 매일 불을 못 때겠는 건, 뭔가 이 넓은 곳에 나 하나 따뜻하자고 나무를 그렇게나 쓰는 게 아깝기도 한 마음과, 약간 엄두가 안 나는 마음 등등이 뒤섞여 있다. 따뜻하진 않아도 춥지만 않으면 그럭저럭 버티다가 손발 시릴 때면 더 이상 안 되겠다 하며 결국 불을 때는 생활을 이어가는 중.

 

실내 온도가 이쯤되면 꽤 손발이 시렵다
머리가 얼어가는 중

  사실 낮이면 해가 들어서 그렇게 춥다고 느끼진 않는다. 일조권 그런 거 걱정할 필요 없는 시골이니까! 근데 웬걸, 씻고 나왔더니 머리가 마르는 게 아니라 얼어가고 있는 거다. 더 이상은 미루면 안 되겠다 싶어서 결국 불을 때러 나간다.

 

 

필수템 : 목장갑
오늘의 작업은 삽질부터. 남은 재를 잘 처리해야 한다.

옷이 다 배렸네?

  재 퍼다 나르는 동안 바람에 흩날려 옷에 다 묻어서 보는 중인데, 사진만 보면 무슨 누구 하나 묻고 돌아오는 길인 것 같다. 시골에서 지내는 게 이렇게 거친(?) 건 줄 알았으면 버려도 되는 옷들 가져오는 건데... 어쩔 수 없이 아끼고 좋아하는 옷들 던져가며 연명하는 중.

 

 

배운 대로 잔가지부터 주워본다
안 되겠어서 결국 외투 탈의

  외투 소매가 길어서 작업하기에 거슬리기도 하고, 딱 하나 있는 외투가 배리면 앞으로 답이 없기 때문에 결국 벗었다. 낮에 해가 뜨고 바람만 좀 덜 불면 바깥은 다행히 그렇게 춥지 않다. 아니면 내가 계속 힘 쓰고 왔다갔다 해서 추위를 못 느꼈던 걸 수도 있고.

 

 

하나씩 차곡차곡 쌓다가
짱 큰 나무 넣어보겠다고 깝치다가 못 들어서 후회 중...
결국 온몸으로 들고, 옷은 배리고, 발로 밀어넣기

  참고로 이 바지 작년 겨울 끝물쯤 산 기모바지라 아직 한 철도 제대로 안 입은, 핏도 길이도 적당해서 내가 참 아끼는 바지인데... 그와 동시에 이곳에 가져온 몇 안 되는 튼튼한 바지라 일할 때 이만한 옷이 없어서 작업복으로 전락해버렸다. 시골에서 집에만 있을 줄 알고 홈웨어만 여러벌 챙겼는데 정말 판단 미스였다. 홈웨어가 아니라 작업복을 챙겼어야 해...

 

 

드디어 직접 불을 붙여 본다

  일반 라이터 거의 처음 써본 것 같은데, 불을 제대로 못 켜서 몇 번이나 켜는 바람에 엄지손가락이 너무 아팠다. 불 다 때고 나서 한참 뒤에 엄지손가락이 따끔거리길래 나무 하다가 가시라도 박혔나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라이터 켜느라 하도 긁어서 아린 거였다.

 

 

1차 시도
불 잘 붙는 낙엽과 잔가지 더 모아다가 넣고 재도전

화력도 더 센 토치로 바꿔서 2차 시도
낙엽과 잔가지 더 넣어다가 암만 해도 안 붙어서 이때 진짜 좀 좌절...
찐으로 지쳤음...

  불 붙이는 게 이렇게나 어려운 건 줄 몰랐다. 혹시 나무... 제가 알고 있던 거랑 다르게 불연성 소재인가요..?

  엊그제 이웃집 아저씨께서 지나가다가 도와주신 게 진짜 행운이었던 거구나. 그날도 혼자였다면 한 시간은 무슨, 해가 다 지도록 못했을 것 같다. 이때만큼은 정말 팀플할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절실했네. 외롭고, 심심하고 그런 기분은 전혀 들지 않는데, 이 시골 생활에 시너지를 낼 수 있는 파트너가 있으면 정말정말 좋겠어.

 

 

4차 시도인지 5차 시도인지 기억도 안 나
붙었다!

  어떻게 붙인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붙었다. 한 곳만 공략하자니 잘 타는 건 금방 타버려서 불은 안 남고 재만 남는 것 같아 골고루 불을 붙이려던 게 오히려 실수였던 것 같다. 어느 정도 불이 붙었다 싶으면 그곳만 집중공략해서 다른 곳까지 저절로 옮겨붙을 수 있도록 해야하는 것 같다...는 나의 뇌피셜. 어떻게 붙었는지 진짜 지금도 몰라. 이날은 한 시간 반 정도 걸린 것 같다.

  불을 다 때고 나니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건너집 할머니께서 오셨다. 이분은 삼촌께서도 나에게 한 번 인사 가보라고 말씀해주셨던 분이고, 딱 한 번 뵌 적이 있어 얼굴을 기억하는 분이었다. 어떻게 인사를 가야할 지 몰라서 미적대는 동안에 4일이 지났고, 결국 할머니께서 먼저 방문을 해주셨네. 강아지랑 산책하다가 우연히 오신 줄 알았는데, 멀리서 굴뚝에 연기가 나는 걸 보고 불 땠나 싶어서 일부러 와보셨다고 한다. 이제 나 동네에서 생존신고는 불 때는 걸로 하면 될 것 같다.

  삼촌뿐 아니라 엄마도 아시는 듯 보자마자 엄마랑 많이 닮았다고 하시며, 불을 혼자 땠냐고 어떻게 불을 붙였냐고 안쓰러운 마음 반, 기특한 마음 반 담은 말씀을 하셨다. 불 때는 거 힘드니까 그냥 기름 보일러 쓰라며 걱정어린 말씀도 해주신다. 맞다, 여기 사실 기름 보일러도 있다. 근데 원래 잘 안 쓰기도 하고, 여기까지 온 김에 나무도 직접 때보고 싶었다. 사람은 믿어주는 만큼 해내는 거고, 나는 그 믿음을 받았으니까.

  원래 잘 모르면 용감하다고, 동네 어르신들은 불 때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알아서 기특하다는 듯이 말씀하시지만, 사실 직접 해보기 전까지 나는 불 붙이는 게 뭐가 어렵나 생각했다. 남들 하면 나도 하지, 하는 마음으로. 모르고 덤볐다가 고생은 좀 했지만 결국 해낸 이 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집에 들어가기 전, 삼촌 밭의 파 오늘도 신세 좀 지겠습니다
칼국수가 될 반죽 준비
어디서 본 건 있어서 열심히 흉내내보는 중

  고된 노동 후에는 역시 밥을 먹어줘야지. 전날 해둔 반죽으로 칼국수를 만들 거다. 우연의 일치인지 뭔지 유튜브의 알 수 없는 알고리즘으로 백선생님의 장칼국수 영상이 뜨길래 그냥 칼국수가 아닌 장칼국수로 정했다.

 

 

일단 반죽을 하긴 했는데 밀대가 없어서 컵으로..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차곡차곡 접어서
하나씩 썰어준다

떡 아니고 칼국수 면 맞습니다...

  어렸을 때 할머니께서 손칼국수 정말 많이 해주셨는데, 그때 어깨너머 배웠던 것들을 십수 년이 지난 지금 떠올리며 흉내내보았다. 할머니는 정말 품이 많이 들어가는 일을 하셨던 거구나. 좀 더 감사한 마음으로 먹을 걸. 역시 사람은 직접 경험해봐야 뭐든 깨우치나 보다.

 

 

드디어 준비 완료

  손으로 하나씩 풀어주고 나니 꽤 모양이 그럴 듯하다. 과연 진짜 칼국수가 되어서도 맛이 있을지 궁금하다.

 

 

오늘은 파 듬뿍
볶은 고기에 멸치육수 투하
핵심 재료인 집된장과 집고추장도 빠질 수 없지!

잠깐 놔둔 사이에 면이 또 살짝 붙어서 조금씩 떼서 넣어준다
그럴 듯한데?
완성!
오늘의 한끼
면... 대성공이야

  내가 했지만 너무 맛있다. 특히 면이 약간 두툼하면서 식감이 쫄깃을 넘어서 쫠깃한 게 아주 미쳤다. 이래서 생면으로 해먹는 건가 보다. 거기에 고기기름+멸치육수+집된장+집고추장으로 끓인 국물도 미쳤다. 표현이 너무 저렴한데 혼자 정말 저런 감탄사를 연발하며 먹어서 더 적을 말이 없네ㅋㅋㅋㅋㅋㅋ 다시 이렇게 만들래도 못 만들 것 같을 정도로 정말 너무 맛있었어!!!!!!! 이곳에 와서 해먹은 메뉴 중 맘에 들기로 세 손가락 안에 꼽는 메뉴.

 

 

식후엔 역시 커피지

  이날은 고된 노동(?) 했다고 몇 안 남은 특별한 커피를 타먹었다. 조금 넉넉하게 만들어서 식힌 후에 냉장고에도 넣어뒀다. 아이스 마시고 싶을 때가 종종 있는데, 얼음도 없고 트레이도 없길래^.ㅜ

 

 

계획에 없던 빨래를 해야만 했다

  나는 이곳에서 정말 집에만 있을 줄 알고 외출복도 많이 안 가져왔는데, 그 외출복들 메리랑 놀아주랴, 불 때랴 하면서 이미 때묻고 닳아버렸다. 특히 오늘 대활약을 한 나의 아끼는 바지는 다음날 꼭 입고 나가야 하기 때문에 더 미룰 수 없이 빨래를 했다. 이래도 내일이면 또 때묻고 닳겠지만.. 작업복.. 작업복이 정말 절실해요.

 

 

오늘의 야식

  하루의 모든 일과를 마치고 느지막이 먹은 야식. 이곳에 와서 과자와 맥주 제외 처음으로 인스턴트 음식 먹은 것 같다. 고민고민하다가 오늘 먹은 게 요거트랑 장칼국수밖에 없어서 결국 하나 깠다. 도시에서는 250m 단위로 떨어져 있는 편의점만 들어가도 발에 채이는 컵라면, 여기서는 너무 소중해. 원래 아는 맛이 더 맛있는 법이라 맛있게 잘 먹었다. 우당탕탕 시골 생활기 어느덧 4일차 마무리.

 

 

Copyright ⓒ 2015 Heigraphy All Rights Reserved.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