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30리가 넘도록 걷고 꽤 무리를 해서 오늘 하루는 쉬어가는 이야기..이고 싶었으나 불 때는 날은 쉬는 날이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날이 되어버렸다. 이건 도대체 언제쯤 익숙해질 수 있을런지.
오늘은 대망의(?) 메리 산책을 시켜볼 거다. 내가 한두 번 해주다가 서울 돌아가면 얘한테 괜히 희망고문 같은 것만 되는 거 아닐까 싶어서 그동안 사실 좀 조심스러웠는데, 멀리는 못 가더라도 그냥 집앞 냄새만이라도 맡게 해주면 좋지 않을까 싶어서 결심했다.
이 녀석 산책 처음 하는 거 맞나 싶을 정도로 너무 잘 따라오던 메리. 내가 멈추면 멈추고, 걸으면 걷고, 뛰면 뛰고, 보폭을 너무나도 잘 맞춘다. 가까운 곳만 왔다갔다 했는데도, 산책 후 표정이 한결 좋아보인다. 근데 사실 나도 강아지랑 산책 처음이다? 강형욱 선생님 영상 주구장창 보면서 이론으로만 알았는데 그런 거 생각도 안 나게 매너있게 잘 걷던 메리. 굿보이!
내 시골 생활 만족도를 20,000% 정도 높여주는 아이템. 불 때러 나가는데 조금이라도 더 힘내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들고 나가 보았다. 방에 있을 때는 정말 24시간 틀어놓고 사는 중. 들고 다니는 전자기기 워낙 많은 조카 때문에 이번 달 전기세 많이 나오는 건 아니겠지..?
불 땔 때 쓰는 마스크는 방진용이다. 집에서 혼자 불 때는데 바이러스 걱정할 일은 없지. 불 피울 때 매캐한 연기가 쉼없이 올라오는데, 가까이 붙어서 계속 토치를 들이밀어야 하기 때문에 눈코입이 여간 따가운 게 아니다. KF94 여러 장 챙겨올 걸 그랬다. 서울 가면 삼촌 쓰시라고 몇 장 주문해드려야지.
불 한참 때고 들어왔는데 반가운 E언니에게 페이스톡 부재중이 찍혀 있었다. 평일 낮에 웬일인가 싶어 다시 걸어보니 연차를 내고 카페에 있다고 한다. 블로그 사진으로만 보던 메리도 보여주고, 보일러실도 보여주고 얘기도 한창 하다가 문득 보일러를 다시 보니 온도가 안 오른다. 아... 불이 꺼진 것 같네... 미안하지만 불을 다시 붙이러 가야 할 것 같다고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끊는다. 훼이크였냐고 불 자식아.
이 집에서 나의 생존신고 표시와도 같은 굴뚝 연기. 중간에 언니랑 잠시 전화를 하긴 했지만 불 다 때고 나니 3시간 정도 지난 것 같다. 1시간 정도까진 그렇다 쳤는데, 3시간이라니 이게 맞는 건가..?
더 이상은 못 하겠다는 마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될 때까지 시도하고 마침내 불이 붙으면 '나도 할 수 있구나'라는 마음이 들게 해주는, 참 이중적인 행위이다. 안 되면 안 되니까 그 절박함이 결국 불을 붙게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분명한 건 이론과 실전은 참 다르다는 것...
집에서 좀 쉬다가 메리랑 산책 한 번 더 하고 돌아오니 벌써 저녁 먹을 시간이다. 이렇게 하루가 후딱 가버리다니. 원래 참치쌈장 만들어 먹으려고 했는데, 오늘도 불 땐다고 고생해서 특별식으로 삼겹살을 구워 먹을 거다.
이건 파채 같은 게 있을 리 만무한 네덜란드 살 때 배운 스킬인데, 파를 세로로 썰어서 돌돌 말아 잘라주면 파채를 만들 수 있다. 삼겹살 먹는데 파채 빠질 수 없잖아?
씻고, 무치고, 굽기만 하는 거라 요리랄 게 딱히 없어서 쓸 말도 별로 없네 허허. 양이 꽤 많았는데 밥까지 더 먹으면서 그걸 다 먹었다. 배고픔보다는 약간 지쳐서 기진맥진 했는데 삼겹살 먹고 힘났다. 역시 한국인의 소울푸드인가 봐.
벌써 혼자 3회차 불을 땠는데, 어째 갈수록 더 쉽지가 않은 것 같다. 거기다 줄어드는 나무를 보니 왠지 모를 죄책감 같은 게 든다. 가스는 줄어드는 게 안 보여서 마음껏 틀게 되는데, 이곳의 나무는 줄어드는 게 너무 눈에 띄니까 나 혼자 이마만 한 나무를 써도 되나 싶고 그렇다. 다시 한 번 환경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순간... 어차피 다 빌려쓰다 가는 것, 최소한으로 해를 끼치며 살 수 있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 고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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