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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적 기록/사진일기

리틀 포레스트는 아닌 그냥 시골 생활기 18 (시즌1 끝)

by Heigraphy 2021.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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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금 급하게 결정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어쨌든 집에 가는 날이 밝았다. 아침을 먹으러 오라는 건너집 할머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곳에 온 후로 그 어느 때보다 부지런히 집을 나서본다. 일찍 일어나니 하루가 긴 것 같고 해도 오래 보고 좋네. 미리 얘기해보자면 이날의 포스팅은 거의 털뭉치들 사진밖에 없다.

 

할머니댁 갈 때마다 보던 소 친구들도 당분간 안녕
조랭이떡 친구들은 아침부터 에너지가 넘치는구나

  오자마자부터 이 녀석들 덕분에 정신이 없다. 묶여있는 녀석이 안쓰러워 늘 일부러 가까이 다가가주는데, 안 묶여있는 녀석이 어김없이 짓궂은 장난을 걸어서 내 냄새 맡기도 힘들다. 오늘도 내 식사하러 온 거라 메리는 없단다 조랭이떡들아. 메리랑은 이따 오후에 다시 올게.

 

 

사진만 봐도 정신없네

  밖에서 이 녀석들 소리가 시끄럽다 싶으면 어김없이 할머니께서 밖을 내다보시고 얼른 들어오라고 해주신다. 정신없는 조랭이떡들을 잠시 뒤로 하고 들어가니 안 묶인 녀석이 벌써부터 신발끈을 물고 장난을 친다. 그 모습을 보신 할머니께서 호통을 치며 내 신발을 높은 곳 어딘가로 올려버리신다. 사실 저는 신발끈 풀어놓는 것도 귀엽고 좋은데..ㅎㅎ

 

 

  오늘도 실례가 될까봐 음식 사진은 없다. 마지막이라고 더 신경써주신 건지 갈비찜에 계란찜에 더덕무침에 귀한 반찬들이 잔뜩 올라와있다. 한그릇 가득 채운 밥을 다 비우고, 사과에 귤에 바나나에 과일까지 이것저것 꺼내주신다. 사과에 귤까지 먹고 바나나는 도저히 다 못 먹을 것 같아서 이건 가져가서 먹어도 될지 조심스레 양해를 구한다. 얼마든지 그러라며 귤 하나, 바나나 하나를 더 얹어주신다. 너무 많다고 하니 그럼 서울까지 가져가서 먹으라고 하신다. 떠나기 전에 저녁도 또 먹으러 오라고 하신다. 식사는 괜찮으니 그냥 이따가 얼굴 뵈러 한 번 더 오겠다고 하니, 밥은 먹고 가야 한다며 오늘만큼은 할머니께서도 지지 않으실 것 같은(?) 기세이다. 일단 알겠다고 한 뒤 자리에서 일어난다.

  할머니께서도 아침 마실을 나가실 모양인지 나와 같은 방향으로 슬슬 걸어가시길래 할머니랑 조랭이떡이랑 같이 짧은 산책을 한다. 갈림길에서 저는 집으로 가보겠다며 와선 메리를 데리고 다시 마을을 걸으러 나선다. 과식 후엔 메리랑 산책하는 게 최고지 역시. 그새 할머니께선 아랫동네까지 다녀오신 후에 돌아오시는 길이라 딱 만나서 할머니, 나, 메리, 조랭이떡 넷이서 산책을 이어간다. 슬슬 약을 올리는(?) 조랭이떡에게 메리가 이젠 반응을 제대로 한다. 메리 줄을 안 잡고 있었으면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끝이 안 났을 듯하다. 할머니께서는 정신없다며 조랭이떡을 혼내시는 듯하면서도 동시에 내심 털뭉치들이 귀엽고 이 상황이 즐거우신지 허허허 웃으신다. 나도 메리랑 둘이서만 산책을 할 때보다 뭔가 마음이 더 따뜻해진다.

 

 

산책 후 오늘의 특별식 냄새를 맡은 메리
한 10초 컷 한 것 같다

  앙둥이가 돌아간 후부터 냉장고를 털고 털어 먹었는데도 도저히 다 먹을 수 없을 것 같아서 결국 메리에게 어묵을 조금 나눔(?)했다. 강아지 입에는 조금 짤 수도 있대서 물에 살짝 데쳐서 줬는데 정말 게눈 감추듯 먹는다. 그러고보면 메리는 이곳에서 사람 먹는 음식도 많이 받아먹으면서 사료도 잘 먹어서 속을 안 썩이는 멋진 개다.

 

 

어묵 먹고 기분 좋아진 메리

표정이 너무 좋네 우리 사랑둥이💛 네가 행복하면 나도 좋아

  산책 오래 하면서 친구도 만나고 할머니도 만나고 돌아와서 특별식까지 먹으니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해맑은 이런 너를 뒤로하고 서울로 가야한다니 죄책감 같은 것도 든다. 건너집 할머니께서도 내가 돌아가면 그동안 좋은 구경 하고 다니던 개가 가장 아쉬울 거라고 하셨는데... 말이 통하면 차근차근 설명이라도 해볼 텐데 너무 미안하다. 그래도 누나 아주 가는 거 아니고 곧 돌아올 거야! 생각보다 금방 돌아올 수도 있어! 오늘은 더 찐한 시간 보내자꾸나.

 

 

냉장고 털기는 끝나지 않았다

  콩불 재료였는데 너무 많아서 반 덜어둔, 까맣게 잊고 있던 팽이버섯이 나와서 앙둥이에게 사진 전송ㅋㅋㅋㅋ 냉장고를 파도파도 뭐가 계속 나와.. 근데 문제는 아침에 과식을 해서 배가 전혀 안 고팠고, 저녁도 할머니댁 가서 먹어야 해서 집에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가 없다는 것. 그래서 저대로 익혀서 그냥 먹었다ㅋㅋㅋㅋ 이 정도면 괴식이야 아주... 이렇게 털고 털어도 못 먹는 것들은 결국 냉장고에 남겨두었다. 삼촌.. 잘 부탁드려요..!

 

 

  블로그 한 편 쓰고, 설거지 하고, 청소를 시작하려는 차에 건너집 할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저녁 먹으러 와!" 청소를 아직 못해서 살짝 바쁘다는 것을 어필해보았지만 어림도 없지ㅎㅎ 그럼 얼른 건너가겠다며 전화를 끊는다. 하던 일들을 대충 마무리하고 이번엔 메리를 데리고 길을 나선다.

 

 

두 녀석만 만나면 나름 조심스럽게 서로를 탐색한다
그러다 안 묶인 조랭이떡 녀석이 나타나면 그때부터 정신없어지는 거임ㅋㅋㅋㅋ

  세 녀석 같이 있는 사진만 봐도 너무 정신없어 이제ㅋㅋㅋㅋ 외향형의 소유자 조랭이떡만 나타나면 더더욱 그런 것 같다. 메리도 나름 동네 개들이랑 친해지고 싶은 것 같은데..! 내향형들을 조금만 배려해주겠니 조랭이떡아..!

 

 

  메리를 잠시 묶어두고 식사를 하러 들어간다. 할머니께선 정말 그저 내 밥을 챙겨주고 싶으셨던 건지, 통화로 조금 바쁜 듯했던 뉘앙스를 기억하시며 이것만 먹고 얼른 가라고 하신다. 있는 동안 계속 받기만 한 듯해서 감사하고도 죄송한 마음. 나도 뭔가를 드릴 수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마지막엔 더 급하게 식사를 마치고 나온 것 같아서 더 마음에 걸린다.

  할머니께서는 다음에 또 오라며, 여름 휴가를 이곳에서 보내는 것도 좋을 거라는 말씀을 해주신다. 꼭 또 오겠다며, 할머니께서도 건강하게 지내시길 바란다는 인사를 드리고 길을 나선다. 어쩌면 빠른 시일 내에 다시 오게 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다음에도 꼭 건강하게 또 뵈어요, 할머니.

  돌아갈 때는 일부러 먼길로 돌아가서 메리랑 오랜 산책을 한 번 더 한다. 지난번엔 미처 끝까지 못 가본 길도 끝까지 걸어본다. 누나가 없어서 산책을 못 해도 당분간은 이 때의 즐거웠던 기억들을 안고 살아갔으면 좋겠다. 다음에 올 때는 꼭 좋은 것들 많이많이 가지고 올게. 이번엔 네가 있는 줄 모르고 아무런 준비를 못 하고 왔어. 다음엔 더 잘 준비해서 와볼게.

 

 

캐리어 가득 다시 짐을 쌌다

  원래 혼자 버스를 타고 기차역까지 가려고 했는데, 그 짐들을 가지고 못 간다고 삼촌이 이웃분께 부탁해주셔서 무려 시간 맞춰 나를 데리러 와주신 분들이 있었다. 오며가며 차에서도 창문 내리고 지내는 건 좀 괜찮냐고 늘 안부를 물어봐주시던 분들이었다.

  마당에 차가 서있으니 이미 경계심 만땅으로 짖기 시작한 메리였는데, 차에 사람이 타니 더 동네가 떠나가라 짖었다. 삼촌 차가 떠날 때도 엄청 울던 녀석이었는데.. 있는 힘껏 더 안아주고 만져주고 결국 나도 차에 탄다. 녀석 입장에선 얼마나 청천벽력 같았을까. 미안하다는 말로도 부족하게 미안하다 메리야ㅠㅠ 당분간은 이웃분들이 잘 보살펴 주실 거라고 믿으며...

  기차역까지 태워주신 이웃분께 감사하다고 인사한 뒤 기차역에 내린다. 배차간격 엄청난 버스 환승해가면서 한 시간은 넘게 걸려서 올 기차역이었는데, 차로 편하고 여유있게 온 덕분에 기차 시간까지 시간도 넉넉했다.

 

 

ktx 처음 타봅니다...

  무궁화호는 발 아래 공간이 넉넉해서 캐리어를 놓을 수 있었는데, ktx는 열차칸 앞쪽에 아예 캐리어 놓는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놀랍게도 ktx는 처음 타본다. 그동안 기차 탈 일이 별로 많지 않았던 데다가, 어쩌다 한 번 타면 무궁화호 타고 그랬으니. 휴대폰 무선충전장치가 있는 게 꽤 신기했다. 기차에서 와이파이도 잘 터져서, 캐롤 플레이리스트 틀어놓고 무선충전하면서 책을 읽었다. 시골집에서 다 못 읽은 책 여기서라도 마저 읽어보려고. 그래도 여전히 다 못 읽었지만.

 

 

  네덜란드로 워킹홀리데이를 갈 때, 돈을 많이 벌거나 영어 실력을 높이겠다는 목표보다는, 나는 어디서든 지속가능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보이고 싶었다. 그 과정이 1년이나 걸렸다는 점에서 조금 더디긴 했지만 그때도 가능성이 아주 없진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어쩌다보니 11월 한 달 내내, 그리고 12월 중순까지도 노마드 같은 생활을 하면서 다시 한 번 실험을 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시골집에서 지낸, 계획보단 길었고 살았다기엔 짧은 시간 동안 다시 한 번 약간의 가능성을 보았네. 그리고 또 다시 어딘가로 가고 싶다는 생각도 물씬. 이번엔 아마 더 먼 곳으로.

  리틀 포레스트는 아닌 시골 생활기라고 했지만 내심 나도 나만의 작은 숲을 찾고 싶었다. 그 숲이 시골집에 있는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오히려 떠나 있으면 그리워지는 나의 도시 서울에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또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완전히 다른 어딘가에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혹은 그냥 떠도는 삶 그 자체인가 싶기도 하고.

  확실한 건 메리와 조랭이떡들이 보고 싶어서 머지않은 시일 내에 시골집을 다시 찾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거다. 그래서 완결이 아닌 시즌1 끝! 여기까지 함께 읽어준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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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우리 메리 앞발 힘 좋네...^^

  서울에 와서야 렌즈캡 씌우려고 살펴보다가 발견한 기스... 카메라 메고 메리한테 갔다가 메리가 앞발로 렌즈 앞부분을 긁은 적이 있었는데, 그땐 지우면 지워지는 자국 같은 게 남은 줄 알았지...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기스가 난 건 줄 알았나... 누나가 강아지는 처음이라 부주의했던 게 정말 많네...^^ 렌즈 자체가 아니라 필터라서 정말 다행이야... 이날을 위해서 난 5년 동안이나 필터를 씌우고 살았나봐. 난 괜찮아 네가 건강하면 됐지! 다음에 볼 때도 건강하게 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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