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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짧여행, 출사

[휴식형] 가을, 봉선사 템플스테이 03

by Heigraphy 2021.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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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선사 경내를 열심히 돌아보고 만족할 만큼 사진을 찍고 나서야 방에 돌아가서 쉴 생각을 했다. '휴식형'으로 왔는데 결코 휴식이 아닌 것 같은 이 기분은.

 

연꿀빵 시식

  밤에 출출할 때를 대비해서 산 연꿀빵을 결국 먼저 먹어보았다. 연근과 마가 들어있다고 해서 도대체 무슨 맛일까 기대 반 긴장 반 했는데 그냥 맛있는 단팥앙금빵 맛이었다. 가끔 아삭한 뭔가가 씹히긴 하는데 그게 오히려 별미이다. 가족들과 내 사람들 나눠줄 걸 좀 사가고 싶을 정도로 맛있었다.

 

 

타이머 열일.. 포기할 수 없는 속세 놀이..
공양간 육화당

  오후 5시부터 5시 15분까지 짧은 저녁 공양 시간이다. 이른 시간에 먹는 편인데 하루가 어찌나 길게 느껴지는지 '드디어'라는 마음이 든다. 휴식형 템플스테이 오면 사실상 할 일이라곤 시간 맞춰 밥 먹는 일밖에 없다. 절밥은 처음이라 어떨지 기대가 되었다.

 

 

각자 먹을 만큼 떠 먹는 방식

  양이 아주 많이 준비된 건 아니기 때문에 뒷사람을 배려하여 적당한 양을 떠가는 게 중요한 것 같다.

 

 

첫 번째 공양

  밥, 각종 나물, 김치, 국 등이 나온다. 개인적으로 나물 반찬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아주 입맛에 맞고 좋았다. 평소보다 밥도 더 담았네. 무조림 옆에 동그랗게 부쳐진 것이 분홍 소시지 같은 건 줄 알고 요즘 절에선 이런 것도 주나 싶은 마음에 약간 기대를 했다. 근데 웬걸 씹으니 아삭 하는 게, 당근이었음... 개인적으로 몇 안 되는 편식하는 음식 중 하나가 당근인데, 1년 먹을 당근 다 먹은 것 같다^.ㅜ

 

 

공양간 내부 & 설거지하는 곳

  공양간에는 직원분들과 템플스테이 참여자밖에 없었다. 스님들과 식사를 함께 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이곳 들어올 때부터 스님들 출입구랑 분리되어 있고, 뭔가 같이 생활을 한다기보다 우린 잠깐 왔다 가는 손님이라는 인식이 좀 더 들었던 것 같다. 스님들 수행을 전혀 방해하고 싶진 않지만 이렇게까지 철저히 분리가 된 게 조금 아쉬운 것 같기도 하고, 이게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요즘은 템플스테이에서 단무지로 그릇 닦아 먹는 발우공양 안 하고, 먹은 것 각자 설거지하고 가면 된다. 각자 떠간 음식은 안 남기는 게 좋겠지.

 

 

작은 전시회

  육화당 안에 봉선사 사진전이 작게 펼쳐져 있길래 나가면서 감상해보았다. 봉선사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다 볼 수 있었다.

 

 

육화당에서 숙소로 가는 길
범종루
사물

  방에서 조금 쉬다 보니 금방 해가 졌다. 사물관람 시간이 되어서 약속 장소로 갔더니 조금 느지막이 스님이 오셨다. 땅 위의 중생을 위해 치는 법고(法鼓), 물에서 사는 중생을 위해 치는 목어(木魚), 공중을 날아다니는 중생을 위해 울리는 운판(雲版), 고통받는 중생을 위해 울리는 범종(梵鍾)을 치신다. 사물관람을 하는 인원이 4명 정도밖에 안 되어서 그랬는지, 범종은 직접 타종할 기회를 주시기도 한다. 칠 듯 말 듯 왔다 갔다 5번을 하다가, 6번째에 힘차게 쳐서 '뎅-'하고 울리면 된다. 저녁이라 33번을 타종했는데, 이는 33천(天)의 문을 열고 닫는다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청풍루 아래 촛불 공양

  범종이 33번 울리고 나면 예불이 바로 시작된다. 누가 절 하는 법을 알려주는 건 아니고 스님들이 절 하실 때 같이 하고, 앉을 때 같이 앉고, 그저 눈치껏 따라 한다. 예불 보는 자리도 스님 자리와 템플스테이 참가자 자리가 확실하게 구분되어 있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절도 참 많이 가봤는데, 여태껏 절하는 법도 모르고 살았다.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다.

 

 

야간 산책
낮에 본 연못이 밤에는 그저 새까맣다
숙소에서 내려다 본 경내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간 절은 참 고요했다. 밤의 풍경은 새롭기도 하고 조용하니 오히려 걸을 맛이 나서 경내를 한 바퀴 더 둘러본다. 다른 템플스테이 참여자들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야간 산책하는 보살님 몇 봤다. (템플스테이 참여자를 '보살님'이라고 부르더라)

 

 

이른 복귀
문은 이중으로 닫고 잠글 수 있다

  절에서 위험할 게 뭐가 있나 싶다가도 혹시 몰라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근다. 예고 없던 빗소리와 천둥소리에 조금 놀라긴 했지만, 집에 있을 때와는 다르게 알 수 없는 편안함이 있었다. 9시부터 소등이라고 하지만, 이미 별다른 할 일이 없던 나는 8시부터 소등을 하고 누워서 이북을 읽었다. 핸드폰에선 볼륨 1 정도로 잔잔하게 잔나비의 노래가 나오고 있다. 타이머를 1시간 정도로 맞춘다. 책을 읽다가 졸릴 때쯤 이마저도 누군가에게는 소음으로 들릴까 봐 베개 아래 핸드폰을 파묻고 잠을 청한다.

  깊은 잠에 빠지지 못하고 정신이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잔나비의 음악이 어디까지 흐르고 있는지 본의 아니게 확인한다. 2시간쯤 지나고 빗소리도 그치고 노랫소리도 그치지만, 그만 잠이 깨고 만다. 습관이라는 게 무서운 것일까.

  암흑인 듯 어디선가 들어오는 약간의 빛으로 시야가 확보되는 숙소 안에서 문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이렇게 바닥에 임시로 매트리스 깔고 잠 못 들어서 천장만 쳐다보던 밤이 있었지. 알크마르 집주인한테 쫓겨나면서 폴란드 출국 전 짐을 맡기러 갔던 암스테르담 친구의 친구 집에서, 기차 시간이 끊겨 본의 아니게 신세를 졌던 밤. 난민인 친구였는데 네덜란드에 살 집도 있는, 나보다 훨씬 상황이 괜찮은 친구였다. 서울 다음으로 사랑해 마지않던 곳을 이상한 사람 하나 때문에 미워할 것만 같던 밤. 결국 뒤척이다 고작 2시간 눈을 붙이고 첫차를 타고 부리나케 나머지 짐을 빼러 알크마르로 돌아갔더랬지.

  그때의 친구들은 여전히 네덜란드에 남아있다. 그는 무슨 꿈이 있길래 그 머나먼 타지에서 악착같이 버티고 있는 것일까. 기자에서 마트 캐셔가 되어서도 그는 버티고 또 버텼다(마트 캐셔 비하 아님). 최근에 들은 소식이 거의 3년 전이기는 하지만, 그 후 직업교육도 받고 멋지게 정착에 성공한 것 같았다. 그 이후로도 네덜란드에 두어 번 갔지만 그 친구를 다시 보는 일은 없었고, 지금은 미안하게도 이름조차 희미하다. 그리고 나는, 왜 버티지 못했을까?

 

 

  2022년의 나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의문사가 하나 더 추가되었다.

 

 

아침 예불 드리러 가는 길
새벽녘 청풍루

  결국 2시간 정도 겨우 눈을 붙이고 새벽 예불을 드리러 간다. 피곤하면 안 해도 되는 게 휴식형 템플스테이의 매력인 건데 그걸 또 굳이 시간 맞춰 간다. 나 말고도 다른 사람들이 꽤 있다. 다들 일찌감치 나와서 새벽 예불 자리잡고 열심히 하는 모습들이 참 한국인답다. 스님들은 염불을 외면서 어떤 생각을 할까, 스님들도 선후배가 있고 그중에서도 mz세대가 있으려나 싶은 아주 엉뚱하고 세속적인 궁금증이 들었다.

  예불은 '나'보다도 뭇 중생을 위해 드리는 건데, 나는 나의 안위만을 바란다. 큰 그릇이 되기에는 멀었다. '모든 물리적인 고민과 문제는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제가 다 해결할 테니 그동안 무너지지 않게 멘탈을 붙잡고 있을 힘을 조금만 주세요.' 기도인 듯 다짐인 듯 언젠가부터 부처님 앞에서 마음속으로 매번 외는 말. 예불이 끝난 후에는 한동안 불경을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개가 잔뜩 낀 선사
아침 공양

  오전 6시 반부터 아침 공양 시간이다. 예불을 드리고 와서 그런지 아침부터 입맛이 돌아서 밥도 많이많이 먹었다. 절밥 너무 맛있는 거 아닌가요. 메뉴 고민할 필요 없고, 요리할 필요 없고, 5~7만 원에 밥도 주고 방도 주는 템플스테이 정말 여느 호캉스보다 훨씬 좋은 것 같다.

 

 

아침 산책

  밥 먹고 나오니 해가 어느 정도 떴다. 이 시간에 절을 돌아다니는 것도 별로 못 해볼 경험이니 또 카메라를 들고 나선다. 휴식형 템플스테이 하면서 진짜 바빴다, 나.

 

 

숙소쪽에서 본 봉선사 경내. 가을의 색이 아름답다.

사무소마저 운치있어 보인다
템플스테이 구역 밖으로
봉향당(카페)
어제보다 낙엽이 더 떨어진 것 같다

  밝은 듯 어두운 듯 희미한 아침의 빛도 그렇지만, 특히 전날 내린 비가 한껏 운치를 더해주는 것 같았다. 이렇게나 안개가 자욱한 선사라니.

 

 

안개 낀 연밭. 햇빛이 없으니 황금빛이 아니네.
인자한 미소의.. 무슨 동물일까?
미륵불상
갈대? 억새?
아미타불
석조불
가을 아침의 색도 아름답다
부처님의 시선에서 본 봉선사
조금 정돈된 느낌

  월요일 아침마다 스님들이 경내 청소를 하신다고 한다. 템플스테이 참여자도 같이 하게 할까 하다가, 휴식하러 온 보살님들일 테니 그러지 않았다고 하신다. 같이 하자고 해도 기꺼이 할 의향이 있었을 텐데.

  이후엔 드디어 숙소에서 못다 붙인 눈을 좀 붙였다. 지난 밤보다 잠이 훨씬 더 쏟아진다. 이번에야말로 깊게 잠들면 안 되는데.

 

 

스님과의 차담

  4명의 참여자가 왔다. 연잎차와 꿀약과를 주시는데 둘 다 맛이 아주 좋다. 무슨 이야기를 할까 싶었는데, 어떤 보살님이 템플스테이를 왜 오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하며 자연스럽게 대화가 시작되었다. 나는 대체로 듣기만 하다가, 내 이야기도 들어보고 싶대서 퇴사를 하고 그냥 쉬고 싶었다며 조금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사실 나도 내가 여기까지 왜 왔는지 잘 모르겠다. 다들 전날 밤 숙소에서 아무 생각도 안 들고 너무 편안하고 빗소리에 운치 있고 좋았다는데, 나는 오히려 온갖 잡념이 떠올라서 힘들었다. 뭔가 번뇌가 더 많아진 느낌. 그래도 다른 보살님들과 스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숙소에서 혼자 생각 속에 파묻힌 것보다 훨씬 기분이 괜찮아진다.

  각자 자세한 사정은 다르지만 이곳을 찾은 보살님들 모두 '쉬고 싶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러다가 '나'를 잘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로 흘러흘러 들어간다. 어떻게 하면 '나'를 잘 알 수 있냐는 질문에 스님은 명확한 답을 주시기보다 빙빙 돌려 다른 말씀을 하신다. 그래, 스님께 답을 바라면 안 되지. 답은 내가 찾는 거지. 문득 어느 보살님이 템플스테이 안 왔으면 이번 주말도 유튜브랑 넷플릭스나 보다가 하루가 갔을 거라고 했는데, 스님이 "영상을 보는 건 나를 잘 아는 것에 방해가 많이 되죠."라고 덧붙인다. 나를 잘 아는 방법은 명확하지 않으나 이를 방해하는 방법은 이렇게나 명확히 알려주시다니. 그러다 결국 내가 부산까지 질문을 질문하는 여행을 떠나게 만든, '결핍'에 대한 결정적 한 마디를 하신다. (질문을 질문하는 여행 참고)

 

 

  스님과의 차담 시간까지 끝나면 숙소를 정리하고, 처음 입소할 때 받았던 수련복과 침대보를 가지런히 모아 사무소에 반납한 후 퇴소하면 된다.

 

 

다시 황금빛으로 돌아온 연밭
연밭 앞에 한참을 앉아 있었네

  차담 시간 전까진 그냥 평소와는 다른 환경에서 짧은 여행 같은 여정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차담 시간 이후 '나'에 대한 생각이 감당할 수 없이 몰아쳤다. 나는 뭘 찾고 싶어서, 뭘 알고 싶어서, 뭘 채우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을까? 질문도 모르는데 답을 찾겠다고 온 것은 아닌지. 그러다 문득 H언니 생각이 났다. 수년 전 잘 다니던 직장을 퇴사하고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와서 무언가를 찾겠다던 언니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언니의 질문은 무엇이었을까? 그래서 언니는 답을 찾았을까? 그렇게 울컥하는 마음에 부산행 열차를 예매해버렸다.

 

 

내 사람들 줄 연꿀빵은 챙겨야 해

  정신을 차리고 이제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카페 파드마에서 연꿀빵을 샀다. 내가 맛있게 먹었으니 내 사람들도 맛있게 먹어주길 바라며.

 

 

봉선사를 뒤로하며

  안녕, 아름다웠던 봉선사. 첫 템플스테이 장소로 이곳을 찾은 건 행운이다. 스님을 만난 것도, 보살님들을 만난 것도, 이야기를 나눈 것도, 타이밍이 이랬던 것도 모두 원래 그렇게 됐어야 할 일들이었나 보다. 남을 신경쓰느라 잊고 살던, '나는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들을 일깨워줘서 감사하다.

  이날을 계기로 11월 내내 멋진 방황을 하고 있다. 그러다 절에 가면 봉선사에서 눈치껏 배운 방법으로 부처님께 절도 올리고 한다. 현실의 불만족과 결핍을 채우기 위한 여행이 끝나면 결국 종교를 찾게 되기도 한다는데, 이미 나도 부처님의 힘을 자꾸 빌리려고 하는 것 같긴 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모든 중생을 구원할 만큼 큰 그릇은 못 되니 일단 나 자신부터 이 번뇌로부터 벗어나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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