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둥이가 온 지 이튿날 아침이 밝았다. 추위를 타는 정도가 달라서 집의 온도를 어찌 맞춰야 할지 모르겠다. 집에서 추위를 별로 타지 않는 나와 추위를 많이 타는 앙둥이. 서초 호캉스 때는 딱 좋지 않았나 했더니, 그때도 앙둥이는 추웠단다. 이런 것도 잘 맞는 사람이 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다.
둘 다 잘 만큼 실컷 자고, 일어나자마자 가스통의 상태부터 보러 간다. 삼촌께 여쭤보니 쓰던 걸 잠그고 예비용 가스통을 열면 된다고 하셨는데, 가스통 처음 만져보는 서울촌놈은 하라는 대로 해도 불안하다. 가스집 번호를 알려주면 새 가스통을 하나 더 주문해놓겠다고 하셔서 알려드리곤 오후쯤 가스 아저씨가 다녀가신 걸 확인한다. 시골집에 오면서 '나 있는 동안 설마 가스통 바꾸는 작업까지 하게 되겠어?' 했는데 이게 돼버리네.
전부터 앙둥이가 마제소바를 만들어서 맛있게 먹었다고 자랑해서, 그 마제소바 나도 좀 만들어달라고 해서 결정된 첫 번째 메뉴. 집에 있는 재료, 앙둥이가 집에서 가져온 재료, 시장에서 사 온 재료 등등을 십시일반 하여 선뜻 마제소바 만들기에 나섰다.
생칼국수면이 쫄깃하니 맛있을 것 같아서 마제소바 면으로 당첨되었다. 지난번 바지락 칼국수 만들어 먹을 때 직접 뽑은 면이 약간 망한 감이 없잖아 있어서 이번엔 마트에서 면을 사 왔다. 3덩이가 들어있었는데 1덩이에 1인분쯤 되겠지 싶어서 손 크게 두 덩이 잡아서 면 풀어주는 중.
그나저나 한 명은 요리하고 나는 사진찍기만 하니까 이렇게 편하고 빠를 수가 없다. 내가 블로그에 얼마나 진심인지 아는 친구라 또 중간중간 이렇게 해줘, 저렇게 해줘 하는 요구사항도 잘 맞춰줘서 더 수월했다ㅋㅋㅋㅋ 협조 고맙다 앙둥! 덕분에 나는 요리에 보탠 건 1도 없고 이 마제소바는 오롯이 앙둥이의 작품이다.
시장과 마트에서 부추를 못 구해서 부추 빼곤 다 있는 마제소바 완성! 아쉽게도 계란은 자리잡지 못하고 주르륵 미끄러져 터져버렸다. 듬뿍 올라간 시장표 의성마늘이 생각보다 꽤 매워서 알싸한 마제소바가 되었다. 칼국수 면은 생각보다 많아서 정말 배 터지게 먹었다. 보기보다 맛이 없을 수 있다며 밑밥을 엄청 깔던 앙둥이였는데 걱정이 무색하게 아주 맛있게 한 그릇 뚝딱 했다.
양이 생각보다 많아서 과식했으니 소화도 좀 시킬 겸 메리랑 산책하자고 길을 나섰다. 건너집 조랭이떡들도 보여주고 싶어서 일부러 그쪽으로 슬슬 걸어가본다.
앙둥이가 메리랑 앞서 걷고 나는 좀 뒤쪽에서 따라오는데 어디선가 조랭이떡이 튀어나와서 막 달려오더랜다ㅎㅎㅎ 마침 할머니께서 어딘가 다녀오시는 길이라 집 앞에서 딱 만났다. 처음 보는 아가씨가 메리의 줄을 잡고 있으니 누군가 싶어 말을 거셨다가, 그 뒤로 오는 나를 보고는 친구가 온 거냐며, 오늘도 어김없이 들어왔다 가라고 초대해주신다.
오늘 한 거라며 쟁반보다 큰 배추전 세 장을 죽죽 찢어주시고, 쫄깃한 절편도 두 줄이나 썰어주신다. 앙둥이가 배추전 먹고 싶다고 해달라고 했었는데 어쩌다 보니 건너집 할머니 댁에서 먹게 되었네. 빼지도 않고 깨작거리지도 않고 잘 먹는다며 친구가 착하다고 하시는 할머니ㅎㅎㅎㅎ 저희 배불러서 산책하러 나온 건데 여기서 또 먹고 있다고 하니, 오히려 밥도 먹고 가라고 하신다. 진짜 배불러서 못 먹는다고 겨우겨우 사양하니 그럼 전과 떡이라도 다 먹고 가라고 하신다.
할머니랑 이야기 나누면서 살짝 젓가락을 쉬는 동안 앙둥이가 진짜 열심히 먹어서 다행히 전은 좀 줄어들었고, 떡이 6점 남아서 눈으로 3점씩 먹자고 했는데, 앙둥이 3점, 나 2점 먹고 마지막 하나 남은 걸 가위바위보 하자고 하니 앙둥이가 눈으로 욕했다ㅋㅋㅋㅋㅋ 배가 찢어질 것 같은 걸 어떡해... 다 안 먹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정말 열심히 먹었다는 앙둥이. 내가 할머니께서 한 대접씩 주시는 밥을 왜 그렇게 넙죽넙죽 다 받아서 먹고 오는지 이제 알겠지?
맛있는 거 먹고 과일도 한 보따리 받아서 나오니 오늘도 조랭이떡이 신발을 다 헤집어놨다. 할머니 신발은 안 건드리는데 손님만 오면 손님 신발을 그렇게 해둔다고ㅎㅎ 여기저기 흩뿌려놓은 건 물론이고 어떻게 놀았길래 정확히 신발 네 짝을 다 끈을 풀어놨는지 모르겠다. 귀여우니 봐준다ㅎㅎ
메리는 아직도 동생들이 불편한 것 같다. 동생들이 다가오면 피하는 걸 넘어서 이제 으르렁거리기까지 한다. 조랭이떡은 그런 메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메리만 보면 같이 놀자고 신나서 어쩔 줄을 모른다.
묶여있지 않아서 아마 동네에서 제일 자유로운 개일 텐데, 우리가 집에 가니 무슨 산책 가는 줄 알고 조랭이떡이 따라왔다. 저쪽에서부터 우다다다 뛰어오고, 놀자고 점프하고, 만져주니 배를 뒤집어 까는 이 애교쟁이에게 앙둥이가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개도 좋아하고 사람도 좋아하는 이녀석도 집 지키긴 그른 것 같네!
앙둥이가 메리 줄만 잡으면 메리 힘에 못 이겨서 저만치 앞서간다. 나는 뒤에서 말랑콩떡이랑 놀면서 천천히 가다보면 어느샌가 말랑콩떡이 앙둥이와 메리를 쫓아 우다다다 달려간다. 말랑콩떡이 우다다다 달려가는 건 대부분 사람한테 달려가는 거라 앙둥이에게 또 폭풍애교를 부린다. 이 와중에 메리는 꼬리 살랑살랑 흔들면서 날 바라보는 게 참 귀엽다. 사랑둥이들 덕분에 너무 마음이 따뜻해지는 풍경이야, 정말!
결국 우리 집까지 따라온 조랭이떡ㅎㅎ 할머니 걱정하실까 봐 요 녀석 데려다주러 한 바퀴 돌아서 할머니 댁 한 번 더 다녀왔다. 어찌나 똘똘한지 돌아가는 길에는 조랭이떡이 우리보다 앞서 가선 뒤돌아보고 기다리면서 마치 우리를 안내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동물 친구들 덕분에 행복했다!
앙둥이가 와도 불은 때야지. 자기는 뭘 하면 되냐는 질문에 그냥 사진이나 몇 장 찍어주고 들어가라고 했는데, 톱질로 하도 고전하고 있으니 앙둥이마저 톱을 들었다. 많이 잘린 것 같은데 톱이 안 드는 단단한 부분이 있어서 어림도 없네.
결국 톱질은 포기하고 톱 자국이 난 곳을 위주로 바위에 내리찍어서 나무를 쪼갰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기쁠까ㅋㅋㅋ
오늘도 나무 쌓는 게 조금 시간이 걸려서 그렇지, 불은 한 번에 붙었다. 불 때기에 숙달이 됐을 때 앙둥이가 와서 다행이다. 이것도 혼자 사진찍고 불 붙이고 북치고 장구치고 안 해도 돼서 더 빨리 붙인 것 같기도 하네!
같이 만들자고 했는데 왠지 또 자연스럽게 앙둥이 주도로 만들게 된 콩불..ㅋㅋㅋㅋ 나는 채소 씻는 것 정도만 하고 사진만 찍었네, 또. 시장에서 콩나물 천 원어치를 샀는데 봉다리 한가득 주셨고, 우린 그걸 다 때려넣었다(...) 거기다 고기를 560g 정도 샀는데, 1인분에 200g 정도 먹지 않냐면서, 이 정도면 2인분 조금 넘는 양이네- 하면서 또 다 넣어버렸다. (기적의 계산법)
콩나물과 고기가 산 같아서 다른 재료의 향은 별로 나지 않으며, 재료 양은 두 배인데 양념장 양은 변함이 없어서 약간은 심심한 맛의 콩불이 탄생했다. 이미 다 만들고 나서 백 선생님의 영상을 다시 확인해보니 4인분 기준 고기 280g을 넣었다. ...? 그럼 딱 2배인 560g을 넣은 우리는 8인분을 만든 건가? 말도 안 돼ㅋㅋㅋㅋㅋ
예상한 맛과는 조금 달랐지만 그래도 맛있게 먹었다. 둘이서 절반 정도는 먹었으니 8인분까지는 아니고 4인분 정도 되나 보다. 우리 양이 많은 게 아니라 백 선생님이 표기를 잘못하신 거라고 믿을래...
그나저나 자꾸 남는 음식들이 생겨서 음식 버리는 거 싫어하는 나로서는 곤란하다. 혼자 먹을 땐 그리 손이 큰 편이 아닌데 같이 먹는 사람이 있으니 손이 엄청 커버리네. 희한하다.
저녁 먹고 조금 뒹굴거리다가 앙둥이에게 해 다 진 뒤에 밖에 나가봤냐고 물어봤다. 테라스에 나가본 게 다고 밖에 완전히 나가본 적은 없다고 해서, 시골의 밤하늘을 보여주기 위해 앙둥이를 데리고 나가본다.
나오자마자 감탄을 금치 못하던 앙둥이. 역시 좋아할 줄 알았어ㅎㅎ 서울의 밤하늘에는 별이 한두 개 정도 그냥 '떠있다'는 느낌인데, 이곳에선 다 셀 수도 없는 별들이 '반짝인다'는 느낌이라 너무 신기하다고 한다. 별이란 게 원래 저런 건데 그동안은 단 한 번도 본연의 모습을 보지 못했던 것 같다며.
이 모습을 혼자 보기가 너무 아까웠는데 네가 와서 참 다행이라고 말한다. 이거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랑 같이 와서 보고 싶은 모습인데,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나눈다. 가만히 서서 별만 쳐다봐도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추위만 아니었다면 몇 시간이고 밖에 앉아서, 누워서 별만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별똥별도 하나 떨어진다. 그 짧은 시간에 앙둥이는 소원도 빌었단다.
지난주에도 이런 복장으로 사진 찍고 있었는데 차가 두어 대 지나가면서 봐버렸다. 내가 이곳에서 가진 옷 중에 제일 따뜻한 옷이라서 어쩔 수 없다. 그리고 어차피 집 앞인데 뭐! 오늘은 너무 추워서 궤적 사진까진 못 찍고 별 사진으로 만족해본다.
혼자보다 둘이 보면 더 재미있으니까 앙둥이 온 김에 1일 1영화 하는 중ㅎㅎ 까망베르 치즈 굽고, 남은 치킨 데워서 맥주랑 같이 착석한다.
라라랜드는 개봉했을 때부터 화제가 되었던 영화라서 봐야지, 봐야지 생각만 하다가 5년이 지나버렸다. 가끔 뮤지컬 같은 연출이 나오면 눈을 뗄 수 없고, 무엇보다 영화 배경이 아름답고 카메라 무빙이 미쳐서 영상미가 너무 좋았다. 그러나 그 외에는 사실 개인적으로 기대만큼 그리 재밌게 보진 못했다. 앙둥이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왜 그렇게 호평일색일까 오히려 조금 궁금해진 영화였다.
워낙 많은 일을 한 하루라 그런지 마제소바 먹고 할머니 댁에서 배추전이랑 떡 먹고 온 게 어제 일 같다고 한다. 이곳에서의 생활이 바쁘게 흘러간다는 걸 백번 이해한 앙둥이. 그녀의 시골 체험 두 번째 날이자 마지막 밤이 저물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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