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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적 기록/사진일기

리틀 포레스트는 아닌 그냥 시골 생활기 13

by Heigraphy 2021.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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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앙둥이의 마지막날 아침이 벌써 밝았다. 알람은 진작부터 울리는데 듣고 일어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역시 마지막까지 여유부려줘야 제맛이지.

  전날 건너집 할머니께 주말에는 버스가 어떻게 다니냐고 여쭤봤더니, 다행히 평일이랑 같은 시간에 다닌다고 해서 앙둥이는 오후에 기차를 타러 나가기로 했다. 2박 3일은 참 짧고 갈 길은 멀어서 앙둥이는 집에 갈 생각을 하니 벌써 까마득하단다. 그 전에 일단 우리가 계획한 먹을 것들을 또 다 먹어줘야지. (먹을 계획만 세운 애들)

 

H표 야매 샌드위치 만드는 중
사실 샐러드로 먹던 조합에 모닝빵만 추가해본 것
투박하고 미니미한 비주얼로 완성

  눈 뜨자마자 출출해서 에피타이저를 만든다(아침식사 아니고 에피타이저임). 앙둥이가 서울에서부터 가져와준 닭가슴살 소시지를 이용해서 야매로 샌드위치 비스무리한 걸 만들어보았는데, 비주얼이 너무 투박해서 빵 터졌다. 이래봬도 소시지는 전자렌지에 한 번 데운 건데 엄청 날것처럼 나왔네. 나름 발사믹 드레싱도 발라보았는데 너무 미미해서 소시지 맛으로 먹은 듯하다ㅎㅎ 이런 야매요리도 맛있게 먹어줘서 고맙다.

 

 

진짜 아점

  원래 이날은 내가 만든 수제비를 먹기로 했는데, 5시에 출발할 거면 두 끼는 먹어야 하지 않겠냐고 설득하여 전날 남은 콩불을 결국 아점으로 먹었다. 전날 좀 싱겁게 먹은 터라, 한 번 더 데워서 쫄아들면 간이 맞지 않을까 했는데 여전히 심심한 맛이었다ㅎㅎ 샌드위치 먹고 먹어서 그런지 결국 다 못 끝낸 콩불.

 

 

  우리 그래도 계획한 건 거의 다 먹었다고, 이제 이따가 수제비만 먹으면 완벽하다고 이야기하다가, 그저께 가스를 다 써서 맛탕을 제대로 먹지 못한 걸 깨달았다. "맛탕이 다 거기서 거기지-"라고 했는데, 아니라고, 백종원 아저씨의 레시피대로 하면 손에 끈적한 거 안 묻고 맛있는 고구마 빠스?가 만들어진다고 해서, 그럼 만들어달라고 했다. 우리 지금까지 계속 먹었는데 진심이냐고 묻는 앙둥이 말에, 진심이니까 만들어달라고, 어차피 갈 때까지 할 거 없지 않냐고 기적의 논리로 설득시킴ㅋㅋㅋㅋ

 

 

결국 고구마 맛탕(빠스) 만들기에 돌입한 앙둥
기름에 고구마를 튀기고
녹은 설탕에 잘 버무려준다

  해달란다고 또 다 해주는 앙둥... 본인은 더 못 먹겠으니 나 다 먹으라며 일단 만들어준다. 다른 고구마 맛탕과 다르게 설탕을 기름에 녹여서 묻히는 게 핵심이라고 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게 진짜 손에 안 묻는다고?' 반신반의하며 지켜보았다.

 

 

고구마 맛탕(빠스) 완성! 고구마 2개로 정확히 8조각씩 나눴네
우유 대신 커피랑 먹어준다. 혼자 한 접시 뚝딱 다 먹음.

  맛만 보겠다며 한 조각 먹고 멈춘 앙둥이와 달리, 정말 한 접시를 다 끝낼 기세로 먹다가 커피까지 타서 여유있게 곁들여준다. 농담 반으로 하는 소리인 줄 알았는데 잘 먹는 모습을 보곤 앙둥이가 만든 보람이 있다고 한다.

  백종원 아저씨 레시피대로 만든 고구마 맛탕은, 손에 설탕은 묻지 않으나 기름이 조금 묻는, 처음 먹어보는 유형의 고구마 맛탕(빠스)였다. (빠스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데 백종원 아저씨 영상에서 계속 빠스라고 부름) 덕분에 후식까지 아주 잘 먹었네.

 

 

  이후에는 씻고, 뒹굴거리고 각자의 시간을 좀 보내다가 앙둥이가 본격적으로 갈 준비를 하는 동안 나는 수제비 만들 준비를 한다. 원래 별 거 안 할 때는 사진도 안 찍으니까 이날의 기록들이 죄다 먹는 것 밖에 없어보이는데, 그 정돈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네...ㅎ

 

 

오전에 해둔 반죽과 채소 준비
아낌없어 넣어주는 채소들

  혼자 뚝딱뚝딱 만들고 있으니 앙둥이가 와선 왜 먼저 시작했냐며, 이제 알아서 사진을 찍어준다. 너도 나만큼이나 내 블로그에 진심인 것 같네.

 

 

어디선가 가래떡을 받아서 들어온 앙둥이

  나 요리하는 동안 앞에 나가서 음식물 쓰레기 좀 버리고 와달랬더니, 어디다 버리는지 몰라서 음쓰는 아직 못 버렸다는데 갑자기 떡을 들고 들어온다. 음쓰 버리러 가서 어떻게 떡이 생겨?ㅋㅋㅋㅋ 지나가던 할머니께서 "아가씨" 하고 부르더니 가져가서 떡볶이 만들어 먹으라며 주셨단다. "못 보던 아가씨네" 하시길래 "친구예요" 했다는 앙둥이. 이 무슨 시트콤 같은 상황인지ㅋㅋㅋㅋㅋㅋ 안 그래도 먹을 게 너무 많아서 어떻게 다 처리하고 가나 걱정인데 뭘 또 얻어오면 어떡해 흑흑.

 

 

수제 반죽 조금씩 뜯어서 넣고, 갖은 재료들도 넣어 보글보글 끓이면
바지락 수제비 완성

  맑은 국물이라 이게 깊은 맛이 날까 살짝 걱정했는데, 오늘도 멸치육수와 바지락육수 치트키 덕분에 괜찮게 나왔다. 거의 10년 만에 수제비 먹는다는 앙둥이. 10년 만에 먹는 게 내가 만든 수제비라니 아주 기념비적이고 영광이네.

 

 

욕심부리지 않고 조금씩만 떠먹기

  오늘도 이미 앞서서 과식을 했기 때문에 적당히 조금씩만 떠먹는다. 이것도 또 남았어... 앙둥이 가고 나면 혼자 언제 다 처리하나 도대체.

 

 

마지막 선물이라며 자진해서 설거지해준 앙둥

  두고 가랬는데 기어이 설거지를 한다. 그렇게까지 해주겠다면 뭐.. 사양은 안 해^^

  그러고보면 앙둥이는 손님이 아니라 그냥 동거인1 정도로 엄청 자연스럽게 지냈다. 15년지기의 힘이 이런 건가. 둘이서 여행 한 번을 가본 적이 없어서 16년지기 되기 전에는 꼭 호캉스라도 하자 했는데, 올해 결국 호캉스도 하고 이 시골에서 같이 생활도 해봤네. 우리 올해 뭐 많이 했다! 내년에도 많이 하자.

 

 

해질녘, 카메라를 들고 오지 않은 게 아쉽다

메리랑 같이 앙둥이 배웅 나감

  조금 여유있게 나왔다가 한 30분 정도 버스를 기다린 것 같다. 사정을 모르는 메리는 산책 나왔다가 안 가고 멈춰있으니 답답한 노릇. 누나 이번에 가면 또 언제 올지 모르는데 조금만 봐주라 메리야.

 

 

또 와요 눈나

  다음에 또 볼 수는 있을지 알 수 없는 메리에게 건강하고 잘 지내기를 바란다며 인사한다. 나에게는 무슨 현지인이 배웅하는 것 같다며 잘 지내다 오라고 한다ㅋㅋㅋㅋ 그래 서울 가서 또 만나. 올해 안에 서울에서 다시 볼 순 있겠지..?

  다행히 버스는 제 시간에 왔지만, 나도 시내 나갈 때 매번 걸어서만 나가봤지 버스를 타고 나가본 적은 없어서 잘 몰랐는데, 꽤 번거로운 루트를 타야하는 모양이었다. 덕분에 기차 시간도 두 번이나 바꾼 앙둥... 정보와 안내가 부족해서 미안하다. 그래도 무사히 도착했다고 하니 다행이야.

 

 

앙둥이가 남기고 간 계정으로 영화 한 편 봤다

  사람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앙둥이가 가고 나니 엄청 허전했다. 이곳에 지내면서 단 한 번도 외롭다는 감정은 느끼지 않았던 것 같은데, 앙둥이가 왔다 가니 부쩍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네. 앙둥이는 내가 본인이랑 서울 같이 가는 줄 알았다고 하는데, 같이 가는 게 맞는 거였나 싶고 그렇다. 더 남아 있는다고 뭐하나 싶으면서도, 서울 가면 또 뭐하나 싶고, 또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인가 싶은 이상한 질문으로까지 빠졌네.

  사실 이제 연말이고, 서울 가면 만날 친구들이 많은데 계속 미루고 있는 것일 뿐이지 뭐. 여기서 백날천날 지낼 건 아닌데 그렇다고 당장 중요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딱히 올라가야 할 이유도 없어서 뭉개고 있는 중. 겨울만 지내기에는 억울해서 봄, 다시 여름, 그리고 가을을 지내고 돌아온 겨울까지 지냈던 <리틀 포레스트> 혜원이의 마음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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